화학·생명

생물은 결국 화학이 살린다고

생물학의 난제를 화학 분자의 정밀한 조작으로 해결하는 화학 생물학의 등장과, 암 치료의 판도를 바꾼 글리벡의 개발 스토리를 조명한다.

편집부 · 2022년 3월 18일 · 읽는 데 4분

생명의학 예술, 세포 표면의 빛나는 단백질 수용체에 완벽하게 도킹하는 매우 상세한 분자 화학 구조
생명의학 예술, 세포 표면의 빛나는 단백질 수용체에 완벽하게 도킹하는 매우 상세한 분자 화학 구조

과거에 생물학자와 화학자들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 생물학자는 현미경으로 세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동물들을 해부하며 생명의 숲 전체를 보려 했고, 화학자는 플라스크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들을 이리저리 섞고 끓이며 원자들의 결합에만 집착했다. 생물학자들에게 화학은 너무 차갑고 딱딱한 환원주의였고, 화학자들에게 생물학은 수학적 수식이 부족한 두루뭉술한 학문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며 두 학문 사이에 쳐져 있던 거대한 장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생명 현상, 즉 우리가 숨을 쉬고 질병에 걸리고 늙어가는 모든 과정이 결국은 단백질과 유전자라는 '거대한 화학 분자들의 물리화학적 연쇄 반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생물학의 복잡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화학자들이 직접 설계한 정교한 분자 무기를 들고 세포 속으로 뛰어드는 융합의 최전선, '화학 생물학(Chemical Biology)'이 어떻게 불치병을 정복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자.

만능열쇠에서 저격수의 총알로, 표적 항암제

화학이 생물학을 구원한 가장 위대한 사건은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Gleevec)'의 탄생이다. 과거의 항암제(세포 독성 항암제)는 일종의 융단폭격이었다. 암세포든 정상 세포든 무작위로 분열하는 세포는 모조리 독성 화학 물질로 죽여버렸기 때문에, 환자들은 머리가 빠지고 구토를 하며 끔찍한 부작용에 시달렸다. 생물학자들이 만성 골수성 백혈병의 원인이 'Bcr-Abl'이라는 돌연변이 단백질이 미친 듯이 세포 분열 신호를 켜두기 때문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을 알아냈다. 이때 화학자들이 나섰다. 그들은 이 돌연변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화학적으로 완벽하게 분석한 뒤, 그 단백질의 스위치(ATP 결합 부위)에만 마치 열쇠구멍에 열쇠가 들어가듯 완벽하게 들어맞는 작고 정교한 화합물을 합성해 냈다. 이 약이 글리벡이다. 글리벡을 먹으면 정상 세포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오직 암을 일으키는 돌연변이 단백질에만 찰칵 달라붙어 스위치를 꺼버린다. 화학 분자가 생물학적 표적만을 정확히 암살하는 '표적 항암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세포 속을 밝히는 형광 분자 램프

화학 생물학의 또 다른 마법은 캄캄한 세포 속을 대낮처럼 밝히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세포 안에서 특정 단백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었지만, 세포는 투명하고 단백질은 너무 작아 현미경으로 볼 수 없었다. 화학자들은 해파리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녹색 형광 단백질(GFP)'의 화학적 원리를 응용하여, 다양한 색깔의 빛을 뿜어내는 수백 가지의 미세한 '형광 탐침(Fluorescent Probe)' 분자들을 합성해 냈다. 이 형광 분자들의 끝에는 특정 단백질이나 암세포에만 달라붙는 화학적 접착제가 발라져 있다. 이 약물을 쥐에게 주사한 뒤 현미경으로 보면, 캄캄한 쥐의 몸속에서 암세포들만 네온사인처럼 붉은색이나 녹색으로 찬란하게 빛을 낸다. 외과의사들은 이 화학 램프 덕분에 수술실에서 암세포와 정상 세포의 경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완벽하게 암 덩어리만 도려낼 수 있게 되었다. 한쪽에는 전통적인 생물학(현미경과 페트리 접시)을, 다른 쪽에는 현대 합성 화학(비커와 빛나는 액체)을 보여주고 중앙에서 합쳐지는 분할 이미지

생체 직교 화학, 세포 안에서 조립되는 약

최근 노벨 화학상(2022년)을 휩쓴 '생체 직교 화학(Bioorthogonal Chemistry)'은 생물과 화학의 결합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약물을 너무 덩치가 크게 만들면 세포막을 뚫고 몸속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화학자 캐럴린 버토지 등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약물을 A 파트와 B 파트로 아주 작게 나눈다. 이 두 조각은 우리 몸속의 물이나 피, 다른 단백질과는 절대로 반응하지 않고(직교성), 오직 A와 B가 만났을 때만 레고 블록처럼 찰칵 결합한다. 환자에게 A 조각(암세포에 달라붙는 유도 장치)을 먼저 주사해 암세포에 붙여놓고, 며칠 뒤 B 조각(독성 약물)을 주사한다. 몸속을 둥둥 떠다니던 B 조각은 암세포에 붙어있는 A 조각을 만나는 순간 강력하게 결합하여 그 자리에서 거대한 항암제로 조립되어 암세포를 박살 낸다. 실험실의 플라스크 안에서 하던 화학 합성 반응을 살아있는 환자의 몸통(세포) 안에서 직접 실시간으로 일으키는 엽기적이고도 혁신적인 투약 방식이다.

단백질 분해 플랫폼, PROTAC의 반란

표적 항암제의 단점은 암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약물(열쇠)이 들어가는 구멍의 모양을 미세하게 바꿔버리면 약이 듣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학 생물학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PROTAC(단백질 분해 표적 키메라)'이라는 무서운 암살자 분자를 만들었다. 이 분자의 한쪽 끝은 암 단백질을 붙잡고, 다른 한쪽 끝은 우리 세포 안에서 쓰레기를 청소하는 효소(유비퀴틴 리가아제)의 멱살을 잡아끌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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