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백혈병과 기적의 항암제 글리벡 gleevec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만성 골수성 백혈병을 만성 질환으로 바꾼 최초의 표적 항암제 '글리벡'의 개발 역사와 화학적 원리를 살펴본다.

편집부 · 2022년 8월 21일 · 읽는 데 4분

혈류 속에서 특정 어두운 암세포를 표적으로 삼아 파괴하는 빛나는 주황색 캡슐 알약의 미세 3D 렌더링
혈류 속에서 특정 어두운 암세포를 표적으로 삼아 파괴하는 빛나는 주황색 캡슐 알약의 미세 3D 렌더링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만성 골수성 백혈병(CML)'이라는 진단은 곧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었다. 골수에서 비정상적인 백혈구가 무한정 증식하여 정상적인 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 무서운 혈액암은, 골수 이식을 받지 못하면 길어야 3~5년 안에 환자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의 항암 치료는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 세포까지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융단폭격 방식(화학 항암제)이었기 때문에, 극심한 구토와 탈모, 면역력 저하라는 끔찍한 부작용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2001년, 스위스의 제약회사 노바티스가 '글리벡(Gleevec, 성분명 이매티닙)'이라는 작은 알약 하나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의학의 역사는 완전히 뒤집혔다. 환자들은 더 이상 머리가 빠지거나 무균실에 갇혀 있을 필요 없이, 하루에 약 몇 알을 먹는 것만으로 암세포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5년 생존율 30%의 불치병이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평생 관리할 수 있는 만성 질환으로 바뀐 것이다. 인류가 암과의 전쟁에서 거둔 가장 완벽한 승리로 평가받는 최초의 '표적 항암제' 글리벡, 그 분자 단위의 정밀한 저격 메커니즘을 파헤쳐 보자.

필라델피아 염색체, 암의 스위치를 켜다

글리벡의 기적은 1960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두 연구원이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들의 세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기형적인 염색체를 찾아내면서 시작되었다. 22쌍의 염색체 중 9번과 22번 염색체의 끝부분이 뚝 끊어진 뒤, 서로 자리를 맞바꾸어(전좌) 붙어버린 비정상적인 염색체였다. 발견된 도시의 이름을 따 '필라델피아 염색체(Philadelphia chromosome)'라 불리게 된 이 돌연변이가 바로 백혈병의 근본 원인이었다. 9번 염색체에 있던 'ABL' 유전자와 22번 염색체에 있던 'BCR' 유전자가 찰팍 붙어버리면서 'BCR-ABL'이라는 끔찍한 잡종 유전자가 탄생한 것이다. 정상적인 ABL 유전자는 세포가 분열할 때만 잠깐 신호를 보내는 스위치 역할을 하지만, BCR 유전자와 결합하는 순간 이 스위치는 영원히 'ON' 상태로 고장 나 버린다. 그 결과 세포 분열을 촉진하는 타이로신 키나아제(Tyrosine kinase)라는 효소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와 백혈구들에게 "쉬지 말고 계속 분열하라"는 잘못된 명령을 내리게 되고, 이것이 바로 암세포가 되는 과정이었다.

자물쇠에 껌을 붙이다, 글리벡의 저격

문제의 원인을 알아낸 생물학자와 화학자들은 고장 난 효소(BCR-ABL)의 스위치를 다시 끌 방법을 찾기 위해 분자 단위의 설계에 돌입했다. 이 효소가 백혈구에게 세포 분열 신호를 전달하려면 'ATP'라는 에너지 분자가 효소의 특정 부위(ATP 결합 주머니)에 딱 들어맞아야 한다. 마치 자물쇠에 열쇠가 꽂혀야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연구진은 ATP 분자와 모양이 아주 비슷하지만, 스위치를 켜지는 못하게 만드는 가짜 열쇠인 '이매티닙(Imatinib, 글리벡의 성분)'이라는 화학 물질을 합성해 냈다. 환자가 글리벡을 복용하면, 이 약물 분자가 암세포 안으로 스며들어가 진짜 ATP 대신 BCR-ABL 효소의 자물쇠 구멍에 찰칵 하고 끼어버린다. 열쇠 구멍에 껌을 단단히 붙여버린 셈이다. ATP가 결합하지 못한 돌연변이 효소는 더 이상 분열 신호를 보내지 못하고 무력화되며, 증식 신호가 끊긴 백혈병 암세포들은 스스로 사멸(Apoptosis)하고 만다. 암을 일으키는 정확한 표적(BCR-ABL 효소)만 골라서 정밀 타격하기 때문에, 정상 세포가 다칠 일이 없어 기존 항암제의 끔찍한 부작용이 획기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자물쇠의 열쇠처럼 효소 수용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약물 분자를 보여주는 화학 다이어그램

글리벡이 열어젖힌 표적 항암제의 시대

글리벡의 성공은 의학계에 엄청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전까지 암 치료는 위암, 폐암, 간암처럼 암이 발생한 '장기(위치)'를 기준으로 약을 처방했다. 하지만 글리벡 이후 과학자들은 암세포가 가진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를 표적으로 삼아 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폐암 환자라도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EGFR)가 있으면 그에 맞는 표적 항암제(이레사 등)를 처방하고, 유방암 환자라도 HER2 유전자가 과발현된 환자에게만 허셉틴을 투여하는 식이다. 암의 종류가 아니라 암을 일으키는 분자 화학적 기전을 공격하는 맞춤형 정밀 의료(Precision Medicine)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더 이상 암세포를 무식하게 독약으로 폭격하는 것이 아니라, 스나이퍼처럼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하나만 정확히 끊어버리는 분자 단위의 저격전으로 암 치료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끝나지 않은 전쟁, 내성과의 싸움

그러나 기적의 알약조차 완벽하지는 않았다. 글리벡을 복용하던 환자들 중 일부에서 약이 더 이상 듣지 않는 '내성(Resistance)'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암세포 역시 맹렬하게 진화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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