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지식더하기 안녕 선모충

과거 덜 익힌 돼지고기를 먹으면 감염되어 인간의 근육을 파먹고 들어가 캡슐을 치는 공포의 기생충, '선모충'의 기괴한 생태계와 기생 생물학을 파헤친다.

편집부 · 2024년 3월 3일 · 읽는 데 4분

기생충학, 굳어지고 빛나는 생물학적 캡슐 안에 숨어있는 소름 끼치게 똬리를 튼 선모충이 보이는 인간 근육 섬유의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미세 내부 뷰
기생충학, 굳어지고 빛나는 생물학적 캡슐 안에 숨어있는 소름 끼치게 똬리를 튼 선모충이 보이는 인간 근육 섬유의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미세 내부 뷰

어른들이 회식 자리에서 항상 하던 말이 있다. "소고기는 핏기만 가시면 먹고, 돼지고기는 바싹 익혀 먹어라!" 요즘 사람들에게는 그저 옛날 사람들의 잔소리처럼 들리겠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말은 목숨을 건 생존의 철칙이었다. 덜 익힌 붉은 돼지고기 한 점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끔찍한 미세 악마들이 바글바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장벽을 뚫고 혈관을 타고 헤엄치다 기어코 우리가 움직일 때 쓰는 '근육' 속에 파고들어 평생을 똬리를 틀고 살아가는 공포의 기생충, '선모충(Trichinella spiralis)'이다. 숙주의 근육 세포를 강탈해 안락한 벙커(캡슐)를 짓고 평생을 숨어 사는 선모충의 기괴하고도 잔혹한 기생 생물학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고기 속에 숨은 암살자

선모충은 알을 낳고 기어 다니는 일반적인 회충이나 촌충과는 궤를 달리하는 독특한 기생충이다. 이 녀석들은 돼지나 쥐, 곰 같은 야생 동물의 '근육(살코기)' 속에 아주 미세한 유충 상태로 몸을 돌돌 말고 잠들어 있다. 문제는 인간이 이 돼지고기를 불에 바싹 굽지 않고 덜 익힌 상태로 꿀꺽 삼켰을 때 벌어진다. 고기가 인간의 위장으로 들어가 강력한 위산에 녹아내리는 순간, 잠들어 있던 선모충 유충들이 "아! 새로운 숙주의 배 속이구나!" 하고 긴 잠에서 깨어나 위장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장벽을 뚫고 근육으로 진격하라

위장에서 깨어난 선모충들은 소장으로 내려가 짝짓기를 하고 어마어마한 양의 새끼(새로운 유충)들을 낳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새끼 기생충들은 소장 벽을 드릴처럼 뚫고 들어가 인간의 혈관(피) 속으로 다이빙한다. 그리고 혈관을 타고 온몸을 빙빙 돌다가, 산소가 풍부하고 움직임이 잦은 팔, 다리, 심지어 안면이나 호흡 근육(횡격막)에 도착하면 혈관을 찢고 근육 세포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간다. 근육에 수백만 마리의 벌레가 파고드는 이 과정에서 인간은 극심한 고열과 근육통, 눈 주변이 퉁퉁 붓는 끔찍한 증상을 겪게 된다. 왼쪽에는 덜 익은 분홍색 돼지고기를 행복하게 먹고 있는 사람을, 오른쪽에는 위산 속에서 즉시 깨어나는 빛나는 기생충 유충의 어둡고 미세한 모습을 보여주는 분할 화면

세포를 개조하여 캡슐을 치다, 간호 세포(Nurse Cell)

근육에 파고든 선모충의 가장 기괴한 화학적 마술이 시작된다. 이 녀석은 근육 세포를 죽이지 않는다. 대신 기생충의 분비물을 내뿜어 인간의 근육 세포 유전자를 해킹해 버린다. 해킹당한 근육 세포는 수축하는 본연의 임무를 잃어버리고, 오직 똬리를 튼 기생충 주변에 혈관을 새로 끌어와 영양분을 갖다 바치는 노예 세포인 '간호 세포(Nurse Cell)'로 변형된다. 기생충은 인간의 세포를 단단한 캡슐 벙커로 개조한 뒤, 그 안에서 피(영양분)를 빨아 먹으며 수십 년 동안 안전하게 동면(석회화)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몸의 근육이 기생충의 안락한 호텔방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돼지를 바싹 굽지 않아도 되는 시대

선모충의 이 끔찍한 라이프 사이클 때문에 인류는 수천 년간 돼지고기를 바싹 익혀 먹는 공포의 식문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현대식 양돈장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선모충은 원래 쥐나 썩은 고기(잔반)를 집어 먹는 야생 돼지에게서 주로 감염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돼지들은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무균 상태의 사육장에서 깨끗하게 통제된 사료만 먹고 자라기 때문에, 기생충이 몸에 들어갈 경로가 100% 차단되었다. 이제 우리나라의 돼지고기에는 선모충이 존재하지 않는다. "돼지고기는 바싹 익혀라"는 말은 삼겹살을 살짝 덜 익혀 먹는 미식의 시대에 사라진 옛날이야기가 된 것이다. 동물의 근육에서 튀어나와 장에서 교미한 다음, 혈류로 곧장 파고들어 새롭고 신선한 근육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기생충의 소름 끼치는 생활사를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남은 과제

양돈장의 돼지는 안전하지만, 멧돼지나 오소리 같은 야생 동물의 생고기나 쓸개즙을 먹는 기행은 여전히 선모충 감염의 치명적인 직격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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