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더하기 바이러스는 몸에 나쁘다
인간을 죽이는 병원체가 아니라 장 속의 나쁜 세균을 암살하고 우리 몸의 면역계와 공생하는 착한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의 생태를 소개한다.
편집부 · 2023년 8월 30일 · 읽는 데 4분
우리는 코로나19나 독감을 겪으며 '바이러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소름이 돋고 손소독제부터 찾게 된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고 파괴하는 절대 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 몸속에 '인간을 절대 공격하지 않고 인간을 지켜주는 착한 바이러스'가 수조 개나 살고 있다면 어떨까? 장이나 피부 점막에 숨어 살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나쁜 세균(박테리아)들만 찾아내어 암살하는 킬러들이 있다. 항생제보다 더 정밀하게 유해균의 대가리를 날려버리는 착한 바이러스들의 대명사,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와 우리 몸의 거대한 생태계(바이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균을 먹어 치우는 거미, 박테리오파지
전자현미경으로 '박테리오파지'를 들여다보면 마치 달 착륙선이나 SF 영화의 외계 로봇 거미처럼 기괴하게 생겼다. 머리에는 유전자가 든 다면체 캡슐이 있고, 밑에는 뾰족한 주사기(꼬리)와 갈고리(다리)가 달려있다. 이 로봇 거미들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세균(박테리아)'이다. 파지는 인간 세포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직 타겟으로 삼은 특정 세균의 껍데기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리고 다리로 꽉 잡은 뒤, 뾰족한 꼬리로 세균의 벽을 뚫고 자신의 DNA를 세균 몸속으로 쭈욱 짜 넣는다.
내부에서 터뜨려 죽이는 완벽한 암살
세균 안으로 침투한 파지의 DNA는 마치 해커처럼 세균의 통제권을 빼앗아버린다. 멍청한 세균은 자기 몸이 해킹당한 줄도 모르고 파지의 명령에 따라 파지의 새끼(복제본)들을 수천 마리씩 미친 듯이 찍어내기 시작한다. 결국 배가 터질 정도로 꽉 찬 파지 새끼들은 세균의 배를 내부에서부터 쫙 찢고(용균 현상)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나쁜 세균은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폭사하고, 튀어나온 수천 마리의 새끼 파지들은 또 다른 나쁜 세균을 찾아 사냥을 떠난다. 항생제가 융단폭격이라면, 파지는 저격수의 정밀 타격인 셈이다.
장 점막에 사는 친위대, 바이롬(Virome)
우리 몸의 장 속에는 유산균 같은 착한 세균(마이크로바이옴)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세균들보다 무려 10배나 더 많은 '착한 바이러스(바이롬)' 무리가 끈적한 점막 속에 숨어 살고 있다. 장에 콜레라균이나 식중독균 같은 나쁜 놈들이 쳐들어오면, 점막에 숨어있던 박테리오파지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놈들의 대가리에 주사기를 꽂아버린다. 우리는 매일 알게 모르게 몸속에 쳐들어온 질병들을 이 착한 바이러스 친위대의 암살 작전 덕분에 방어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항생제의 종말을 구원할 슈퍼 바이러스 치료법
현대 의학은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를 남용하다가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끔찍한 '슈퍼 박테리아'의 역습을 맞고 있다. 약이 안 듣는 슈퍼 박테리아에 감염되면 인간은 손도 못 쓰고 패혈증으로 죽어야 한다. 이때 의사들이 마지막 구원투수로 꺼내 드는 무기가 바로 파지다. 아무리 항생제에 맷집이 강한 슈퍼 박테리아라도, 그 박테리아만 전문적으로 찢어 죽이는 천적 '박테리오파지'를 환자의 혈관에 풀어버리면 세균은 꼼짝없이 터져 죽고 만다. 바이러스로 세균을 잡아먹는 이른바 '파지 테라피(Phage Therapy)'다.
남은 과제
파지는 너무 정밀해서 A라는 세균에는 완벽하게 작동하지만 B라는 세균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숙주 특이성). 따라서 환자의 몸에 어떤 세균이 들어왔는지 정확히 알아내고, 그 세균을 죽이는 '맞춤형 파지'를 찾아내어 배양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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