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 고추, 계피와 같은 향신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향들로 인해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는 식재료입니다. 마트나 시장에 가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후추를 구할 수 있고, 그 가격 또한 합리적이어서 후추가 비싸 아껴쓰는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광경일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이 후추가,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는데요. 당시에는 음식의 풍미를 높여주는 것 이외에도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음식을 보다 오래 저장하기 위해 향신료를 사용했고, 특유의 향 때문에 질병을 예방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등 쓰임이 굉장히 유용했습니다. 이러한 점은 향신료의 주요 생산지가 인도를 비롯해 유럽과 멀리 떨어진 동양 지역인 것과 더불어 향신료의 가치를 크게 높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15세기에는 향신료가 비슷한 부피의 보석과도 교환될 정도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팔 정도로 사람들이 향신료에 열광했다고 하며, 결국 향신료는 대항해시대를 여는 촉매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럽인들에게 열렬히 사랑받은 향신료,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고추와 후추는 왜 매울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만들 때 대부분 고추를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운 맛을 내는 향신료에 가장 먼저 고추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유럽권에서는 매운맛을 내는 향신료로 후추(pepper)가 먼저 정착되어 대세를 이루고 있었기에 고추는 유럽 문화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고 붉은 후추(red pepper)정도의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후추는 유럽의 요리와, 고추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요리와 결합하였고, 오늘날에는 인류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향신료들 중 하나가 되었는데요. 과연 후추와 고추의 무엇이 이들을 맵게 만들까요?

후추가 왜 매운맛을 내는지 알려면 먼저 매운 맛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실 매운맛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맛이 아니라 통각입니다. 우리 몸의 다섯가지 감각 중 미각이 아닌 통각으로 느끼는 감각기며, 혀에 집중되어 있는 미각 신경과는 달리 통각 신경은 온 몸에 걸쳐 존재하기 때문에 피부로도 매운 기운을 어느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후추가 매운 이유는 후추 속에 들어 있는 화학 물질이 통각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인데, 피페린(piperine)이라고 불리는 이 화학 물질은 C17H19O3N의 분자식을 가지고 있으며 벤젠고리를 가지고 있는 방향족 화합물입니다. 피페린 분자의 모양은 통각 신경의 말단에 있는 단백질 모양과 닮았는데, 피페린과 이 단백질 분자가 결합하여 우리가 매운 맛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고추에서 매운 맛을 내는 화학 물질로 유명한 캡사이신이 피페린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고추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과 전 세계에 알려졌는데, 후추와 똑같이 매운 맛을 내는 향신료입니다. 고추 속에 들어 있는 화학 물질인 캡사이신(capsaicin)은 C18H27O3N으로 피페린과는 사뭇 다르지만, 피페린처럼 하나의 방향성 고리를 가지고 있고 피페린과 닮은 산소(O)-탄소(C)-질소(N)의 결합을 가지고 있는 등 구조적으로 피페린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매운맛을 낼 때도 피페린과 동일한 단백질과 결합한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분자 구조가 후추와 고추의 매운맛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운 맛은 아픈 감각, 통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발적으로 매운 맛을 느끼고자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곤 합니다. 매운 맛은 통각인데 우리는 왜 이 통각을 느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통각에 반응해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 뇌에서 분비하는 호르몬인 엔도르핀 때문입니다. 인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마약이라 불리는 엔도르핀은 분비되었을 때 쾌캄을 느끼게 합니다. 매운 정도가 커질수록 엔도르핀의 분비도 활발해지니, 매운 맛에 중도된 사람들은 더 매운 것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이지요.
향신료가 질병을 예방해 준다고?
후추와 고추 못지않은 영향력으로 유럽을 뒤흔든 향신료인 정향과 육두구는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에서 유럽인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톡 쏘는 향과 달콤함은 나시고랭과 같은 수많은 인도네시아 요리에 사용된 훌륭한 향신료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향은 식재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향의 구성성분은 유게놀(eugenol, C10H12O2)은 곤충들이 기피하는 매우 강한 향을 내고 향균작용에 탁월하며 마취 특성을 가집니다. 강한 향을 가진 정향은 예로부터 동양에서 구취 제거제와 해충 기피제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유럽에 넘어온 정향은 음식을 오래 저장하기 위해 식량에 첨가되거나 마취제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유게놀이 간에 독성을 가지고 있고 약간의 환각성이 있어 다량 섭취하면 발작을 일으킬 수 있으나, 지금까지도 정향은 은단과 국소 마취제의 성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육두구의 경우는 흑사병의 한 종류인 패혈증을 예방할 수 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육두구의 구성성분인 아이소유게놀(isoeugenol, C10H12O2)이 만들어낸 효과입니다. 유게놀과 똑같은 분자식을 가지고 있으며, 구조 또한 매우 유사한 아이소유게놀은 유게놀처럼 강력한 살충작용을 가지고 있는데, 이 효과로 패혈증의 원인인 벼룩(페스트 세균을 운반하는 매개체)의 접근을 막아 패혈증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정향과 육두구는 과가 다른 식물이며 그 향기와 쓰임새 또한 다르지만, 유게놀과 아이소유게놀의 구조는 피페린과 캡사이신과 같이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이중 결합의 위치 하나만 다를 뿐이지요. 우리는 이들을 보고, 아주 작은 화학 결합 한 개가 큰 화학적 차이를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사는 화학 결합이 만들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만들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발견하게 만들었던 향신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후추와 고추의 사례에서는 화학적인 구조가 비슷해 비슷한 성질을 가지는 경우를 보았고, 정향과 육두구의 사례에서는 아주 미세한 화학 결합의 차이가 큰 성질의 변화를 보이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 작은 화학 결합이 콜럼버스와 마젤란을 움직였고, 유럽의 항로 개척을 이끌어냈다는 사실,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시나요? 이런 면에서 ‘세계사는 화학 결합이 만들었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생활 곳곳에 숨어 있는 화학 결합이 어떤 엄청난 미래를 만들게 될지, 누가 알까요?

참고자료
[1] 페니 르 쿠터 – 역사를 바꾼 17가지 화학 이야기(사이언스 북스)
[2] 장 마리 펠트 – 향신료의 역사(좋은책만들기)
[3] 위키피디아
https://ko.wikipedia.org/
[4] Pubchem
https://pubchem.ncbi.nlm.nih.gov
[5] The pungent substances piperine, capsaicin, 6-gingerol and polygodial inhibit the human two-pore domain potassium channels TASK-1, TASK-3 and TRESK
https://www.ncbi.nlm.nih.gov
첨부 이미지 출처
[1] https://theydiffer.com
[2] https://onlinelibrary.wiley.com
[3] https://blog.naver.com
[4] https://www.semanticscholar.org
[5] http://itempage3.auct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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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용원
발행호│2020년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