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세상 모든 결정물질이 여기에 csd

전 세계 화학자들이 발견한 100만 개 이상의 3차원 결정 구조를 모아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CSD가 어떻게 신약 개발과 신소재 설계의 핵심 무기가 되었는지 탐구한다.

편집부 · 2022년 1월 16일 · 읽는 데 4분

미래형 데이터 센터, 수백만 개의 떠다니는 3D 분자 결정 구조로 가득 찬 빛나는 거대한 디지털 도서관
미래형 데이터 센터, 수백만 개의 떠다니는 3D 분자 결정 구조로 가득 찬 빛나는 거대한 디지털 도서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책을 모아둔 곳이 도서관이라면, 자연계와 실험실에 존재하는 모든 '화학 분자의 입체 도면'을 긁어모아 둔 궁극의 도서관은 어디에 있을까? 탄소, 수소, 산소 같은 원자들이 어떻게 손을 잡고 3차원의 뼈대(결정)를 이루고 있는지 그 모양을 아는 것은, 그 물질이 독약이 될지 기적의 치료제가 될지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다. 전 세계 화학자들이 피땀 흘려 분석해 낸 이 분자의 3D 구조도들을 한곳에 영구적으로 보존하고 누구나 검색할 수 있게 만든 화학계의 구글(Google), 그것이 바로 '케임브리지 구조 데이터베이스(Cambridge Structural Database, CSD)'다. 1965년 영국의 한 작은 연구실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무려 100만 개가 넘는 유기 및 금속-유기 화합물의 3차원 지도를 품고 있는 이 거대한 디지털 우주는 오늘날 현대 제약 산업과 신소재 공학을 이끄는 가장 강력하고 은밀한 무기가 되었다. 분자들의 빅데이터가 만들어내는 화학 혁명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X선 결정학의 파편들을 긁어모으다

CSD가 탄생하기 전, 화학자들은 자신이 새로운 물질의 구조를 발견하면 그 3차원 좌표 좌표(x, y, z)들을 빽빽한 숫자 표로 만들어 두꺼운 학술지 종이 위에 인쇄했다. 다른 학자가 그 구조를 참고하려면 도서관 먼지 구석에서 책을 찾아 일일이 숫자를 베껴 적은 뒤 손으로 그림을 그려봐야만 했다. X선 결정학이라는 기법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위치를 찍어내는 것 자체도 노벨상감이었지만, 그 귀중한 데이터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장되는 것은 화학계의 거대한 손실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올가 케너드(Olga Kennard) 박사는 흩어진 결정 구조 논문들을 샅샅이 뒤져 모든 원자의 3차원 좌표를 펀치 카드(초기 컴퓨터 입력 방식)에 구멍을 뚫어 맹렬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CSD의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종이 위에 죽어있던 숫자들은 컴퓨터 스크린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생생한 3D 분자 모델로 부활하여 화학자들의 눈앞에 마법처럼 펼쳐졌다.

100만 개의 분자, 신약 개발의 내비게이션

오늘날 CSD는 단순한 저장소를 넘어 거대한 '예측 엔진'으로 진화했다. 제약회사에서 새로운 항암제를 만들 때, 무작정 실험실에서 화학 물질을 섞어보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무식한 방법이다. 대신 화학자들은 먼저 컴퓨터를 켜고 CSD에 접속한다. "암세포 단백질의 표면 구멍 모양이 이렇게 생겼는데, 이 구멍에 완벽하게 들어맞으면서 물에 잘 녹는 3차원 구조의 약물 분자가 있을까?" CSD에 저장된 100만 개의 분자 데이터베이스를 순식간에 훑어(가상 탐색, Virtual Screening) 가장 찰떡처럼 모양이 맞는 분자 구조를 몇 가지 후보로 콕 집어낸다. 이것이 바로 '구조 기반 신약 설계(SBDD)'다. 컴퓨터가 100만 개의 열쇠 뭉치 속에서 가장 알맞은 열쇠를 1초 만에 골라주는 이 내비게이션 덕분에, 인류는 에이즈(HIV) 치료제부터 코로나19 치료제에 이르기까지 기적의 신약들을 엄청난 속도로 쏟아낼 수 있었다. 화학 데이터베이스, 신약 분자의 복잡하게 연동된 결정 격자를 보여주는 컴퓨터 화면을 보는 과학자

결정다형(Polymorphism), 약의 목숨을 가르는 구조

CSD가 특히 위력을 발휘하는 분야는 '결정다형(Polymorphism)' 현상을 예측하는 것이다. 화학 성분이 100% 똑같은 약이라도, 그 약을 알약으로 뭉칠 때 분자들이 어떤 모양(결정)으로 쌓이느냐에 따라 약효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 어떤 모양으로 뭉치면 위장에서 스르르 잘 녹아 피 속으로 흡수되지만, 다른 모양으로 잘못 뭉치면 벽돌처럼 단단해져 위장에서 녹지 않고 똥으로 고스란히 배출되어 버린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에이즈 치료제 '리토나비르'는 시판 중에 갑자기 알약 구조가 엉뚱하게 단단한 결정으로 변해버려(용해도 저하) 약효가 완전히 사라지는 사상 초유의 판매 중단 사태를 겪었다. 제약회사들은 이 끔찍한 재앙을 막기 위해 신약을 출시하기 전 반드시 CSD 데이터를 돌려본다. 이 약물이 나중에 보관 온도나 습도에 따라 원치 않는 모양(결정)으로 틀어질 위험은 없는지 미리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여 완벽하고 안정적인 알약을 조제하는 것이다.

화학에서 소재 과학까지, 데이터의 확장

제약뿐만이 아니다. 차세대 태양광 패널이나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갈 새로운 유기 신소재를 찾을 때도 CSD는 필수적이다. "전기를 가장 잘 보관하면서도 열에 강한 3차원 분자 구조는 무엇일까?" 과거 화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우연히 발견하기만을 기도했던 신소재들은, 이제 CSD의 막대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머신러닝)이 결합하며 모니터 속에서 뚝딱뚝딱 분자를 레고 조립하듯 설계되어 현실 세계로 튀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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