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계

머리카락 굵기의 10만 분의 1 크기로 움직이는 분자 기계의 화학적 설계 원리와 2016년 노벨 화학상 수상의 의미, 그리고 나노 로봇의 미래를 조명한다.

편집부 · 2023년 10월 13일 · 읽는 데 4분

나노 기술, 인간의 혈관 내부에서 작동하는 단일 원자와 분자로 만들어진 빛나는 네온 미래형 작은 기계
나노 기술, 인간의 혈관 내부에서 작동하는 단일 원자와 분자로 만들어진 빛나는 네온 미래형 작은 기계

인류는 더 크고 더 강한 기계를 만들며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거대한 증기기관이 기차를 움직였고, 하늘을 찌를 듯한 로켓 엔진이 우주를 향해 불을 뿜었다. 하지만 21세기 화학자들의 시선은 거대한 하늘이 아니라 돋보기로도 보이지 않는 아주 작고 은밀한 심연으로 향했다. "만약 머리카락 굵기의 10만 분의 1 크기밖에 안 되는 원자와 분자들을 톱니바퀴처럼 조립해서, 윙윙 돌아가는 '모터'나 물건을 들어 올리는 '엘리베이터'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SF 영화의 상상력 같은 이 미친 아이디어는 장난감이나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라 현실의 화학 플라스크 안에서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기계 중 가장 작고 치명적인 발명품, 2016년 노벨 화학상을 휩쓸며 나노 로봇의 시대를 알린 '분자 기계(Molecular Machine)'의 경이로운 연금술을 파헤쳐 보자.

화학 결합의 고정관념을 부수다, 카테네인

기계가 움직이려면 부품들이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관절이나 바퀴처럼 뱅글뱅글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화학 세계의 기본 상식은 달랐다. 원자들을 묶는 화학 결합(공유 결합)은 강력한 접착제 같아서 한 번 붙으면 꼼짝도 하지 못했다. 1983년 프랑스의 장피에르 소바주(Jean-Pierre Sauvage)는 이 뻣뻣한 상식을 깨부쉈다. 그는 두 개의 고리 모양 분자를 마치 마술사의 쇠고리처럼 서로 엇갈리게 끼워 넣는 데 성공했다. 이를 '카테네인(Catenane)'이라 부른다. 두 고리는 찰흙처럼 엉겨 붙지 않고 기계적인 사슬로만 묶여 있어서, 서로 분리되지는 않지만 마치 열쇠고리에 걸린 열쇠처럼 빙글빙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부품이 자유롭게 회전할 수 있는 최초의 '분자 관절'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와 분자 자동차의 탄생

관절이 생겼으니 이제 그 부품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동력'이 필요했다. 1991년 영국의 프레이저 스토더트(Fraser Stoddart)는 기다란 막대기 분자(축)에 동그란 링 분자를 끼워 넣은 '로탁세인(Rotaxane)'을 만들었다. 링이 막대기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대기 양끝에 뚱뚱한 분자 마개도 씌웠다. 기가 막힌 것은 이 링 분자가 막대기 위아래를 셔틀버스처럼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스토더트는 특정 열이나 전기를 가하면 링이 위로 쓱 올라가고, 식히면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분자 엘리베이터'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1999년 네덜란드의 베르나르트 페링하(Bernard Feringa)는 빛(자외선)을 비추면 모터의 프로펠러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미친 듯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100% 완벽한 '분자 모터(Molecular motor)'를 만들어냈다. 이 분자 모터 4개를 분자 판(차체)에 덜컥덜컥 달아 금 표면 위에 올려놓고 빛을 쏘았더니, 이 기괴한 분자 자동차는 네 바퀴를 맹렬히 굴리며 금 표면을 쌩쌩 달려나갔다. 화학 물질이 생명체도 아니면서 스스로 움직이는 나노 자동차로 진화한 것이다. 금 원자 표면 위를 달리는 화학 결합과 분자 고리로만 만들어진 자동차의 초현실적인 미세한 모습

분자 기계는 어디에 쓰일까? 체내 암살자와 나노 공장

분자 기계의 등장은 의학과 화학 공학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가장 폭발적인 잠재력은 체내 '나노 로봇(스마트 약물 전달체)'이다. 캡슐 모양의 분자 기계 안에 강력한 항암제 독약을 가득 채우고 환자의 혈관에 주사한다. 이 기계는 혈관을 둥둥 떠다니다가 정확히 암세포의 표면(특정 온도나 산성도)에 닿는 순간, 뚜껑(분자 마개)이 찰칵 열리며 암세포 머리 위로 항암 폭탄을 쏟아붓고 다시 문을 닫는다. 정상 세포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암세포만 골라서 처형하는 완벽한 화학적 암살자다. 또한, 분자 모터를 빽빽하게 이어 붙인 '인공 근육'은 전기를 가하면 사람의 근육보다 100배나 더 강력하게 수축하는 힘을 낼 수 있어, 전신 마비 환자를 위한 궁극의 부착형 외골격 슈트를 만들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시 세계의 통제

더 나아가 분자 기계는 공장의 생산 라인마저 나노 세계로 축소시켰다. 영국의 데이비드 리(David Leigh) 연구팀은 분자 로봇 팔이 콘베이어 벨트처럼 배열된 아미노산(단백질 재료)들을 차례대로 집어서 조립하는 '분자 펩타이드 합성 로봇'을 시연했다. 거대한 화학 공장에서 펄펄 끓여 만들던 약물을,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로봇 수억 개가 플라스크 안에서 알아서 뚝딱뚝딱 조립해 내는 마법의 공장이 탄생한 것이다. ![화학 노벨상 개념, 분자 엘리베이터와 모터의 떠다니는 홀로그램 다이어그램을 경외감에 차 바라보는 과학자](https://image.polli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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