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생물뉴스 만성 통증의 비밀

상처가 다 나아도 사라지지 않는 만성 통증의 신경학적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통증이 단순한 증상이 아닌 뇌 자체의 질병이라는 관점의 전환을 소개한다.

편집부 · 2024년 12월 26일 · 읽는 데 4분

생물학적 의학 렌더링, 손상된 신경말단을 감싸며 불타는 붉은 통증 신호를 발산하는 염증성 교세포의 빛나는 미세 현미경 뷰
생물학적 의학 렌더링, 손상된 신경말단을 감싸며 불타는 붉은 통증 신호를 발산하는 염증성 교세포의 빛나는 미세 현미경 뷰

길을 걷다 발목을 삐끗하거나 뜨거운 냄비에 손을 데면 끔찍한 고통이 밀려온다. 우리는 이 통증을 싫어하지만, 사실 통증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가장 완벽한 경보 시스템이다. 아프니까 발목을 더 쓰지 않고 쉬게 만들어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뼈가 다 붙고 상처가 감쪽같이 아물었는데도, 화재경보기가 꺼지지 않고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밤낮없이 미친 듯이 울려대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다. 칼로 살을 에는 듯한 통증에 시달려 병원에서 MRI와 엑스레이를 수십 번 찍어보아도 의사는 "뼈와 신경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정신적인 문제입니다"라는 야속한 말만 되풀이한다. 상상 속의 꾀병이 아니라 진짜 지옥 같은 고통을 겪는 환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질병, 바로 '만성 통증(Chronic Pain)'이다. 만성 통증은 단순히 '오래가는 통증'이 아니다. 통증 신호를 받아들이는 뇌와 신경망 자체가 물리적으로 완전히 기형으로 변해버린 독립된 '뇌 질환'이다. 인류를 괴롭히는 가장 고독하고 잔인한 질병, 만성 통증의 숨겨진 신경학적 메커니즘을 파헤쳐 보자.

고장 난 화재경보기, 신경 가소성의 저주

우리의 신경계는 고정된 전선이 아니라, 자주 쓰는 회로는 굵어지고 안 쓰는 회로는 끊어지는 찰흙 같은 성질(신경 가소성, Neuroplasticity)을 가지고 있다. 원래 통증은 피부의 통각 수용기에서 발생한 전기 신호가 척수를 거쳐 뇌로 전달되며 느껴진다. 그런데 디스크나 신경 손상 등으로 극심한 급성 통증이 너무 오랫동안 척수와 뇌를 맹렬하게 타격하면, 우리 뇌의 신경망은 이 끔찍한 신호에 적응해 버린다. 즉,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고속도로를 비정상적으로 뻥 뚫어버리고,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센서의 민감도를 최대로 올려버리는 것이다(중추 감작 현상). 이 상태가 고착화되면 바람이 살짝 스치거나 옷깃만 닿아도 뇌는 이를 '불에 타는 듯한 고통'으로 뻥튀기하여 느끼게 된다(이해통). 상처라는 원인(불)은 진작에 다 꺼졌는데, 화재경보기 자체가 고장이 나서 시도 때도 없이 경보음을 울려대며 온몸을 불바다처럼 느끼게 만드는 잔혹한 신경의 저주다.

숨겨진 흑막, 미세아교세포(Microglia)의 반란

과거 과학자들은 통증이 신경 세포(뉴런)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뇌과학의 발전으로 만성 통증의 진짜 흑막이 밝혀졌다. 바로 뉴런 주변에서 찌꺼기를 청소하고 영양분을 공급하던 뇌 속의 청소부, '교세포(Glia cell)' 특히 미세아교세포의 반란이다. 신경이 한 번 크게 다치면, 얌전하던 청소부 교세포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며(활성화) 염증 유발 물질(사이토카인 등)을 쉴 새 없이 뿜어내기 시작한다. 이 독성 물질들이 주변의 멀쩡한 통증 뉴런들을 미친 듯이 자극하여 마치 전선이 합선된 것처럼 통증 신호를 스스로 무한 발사하게 만든다. 상처 부위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없어도, 척수와 뇌 안에 진을 치고 있는 교세포들이 스스로 끔찍한 염증 수프를 만들어내어 끊임없이 가짜 통증을 찍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만성 통증이 진통제로 절대 낫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통제는 뉴런을 억제할 뿐, 폭주하는 청소부 교세포들을 진정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끝없는 만성 통증을 나타내는 복잡하게 꼬인 미로로 배경이 희미해지는 동안 고통 속에서 빛나는 붉은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

마약성 진통제(오피오이드)의 끔찍한 배신

만성 통증 환자들이 겪는 절망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잠을 잘 수도, 걸을 수도 없어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병원에서는 이 고통을 끄기 위해 결국 최후의 수단인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한다. 펜타닐이나 옥시코돈 같은 오피오이드는 뇌의 통증 스위치를 강제로 꺼버려 기적처럼 고통을 잊게 해 준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다. 뇌는 강력한 약물에 금방 적응(내성)하여 며칠 뒤면 더 센 약을 요구하고,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 이전보다 훨씬 더 끔찍한 반동 통증(Hyperalgesia)을 일으키며 환자의 뇌를 완전히 망가뜨린다. 통증을 피하려다 마약 중독의 구렁텅이에 빠진 미국의 오피오이드 위기(매년 수만 명 사망)는 만성 통증 치료의 끔찍한 한계와 제약회사의 탐욕이 빚어낸 현대 의학의 뼈아픈 비극이다.

통증을 지우는 새로운 희망, 뇌 자극과 VR

마약성 진통제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학자들은 아예 약물을 쓰지 않고 뇌의 회로를 물리적으로 리셋시키는 기술에 돌입했다. 환자의 척수 신경이나 뇌 깊은 곳에 가느다란 전극을 심어 미세한 전기를 흘려보내 통증 신호를 교란시키는 척수 자극술(SCS)이 대표적이다. 최첨단으로는 가상현실(VR) 기술이 통증 치료에 쓰이고 있다. 화상 환자나 만성 통증 환자에게 VR 고글을 씌워 시원한 얼음 나라나 평화로운 숲속을 탐험하게 하면, 뇌의 시각과 주의력 회로가 VR에 100% 쏠리면서 통증 회로의 스위치를 아예 꺼버리는 놀라운 마취 효과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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