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사라져가는 아이

근육이 서서히 소실되는 희귀 유전 질환의 생화학적 메커니즘과, 이를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 기술의 눈부신 성과를 소개한다.

편집부 · 2023년 2월 3일 · 읽는 데 4분

분자 가위로 절단되는 특정 손상된 부분을 보여주는 빛나는 DNA 이중 나선, 의학적 SF 개념
분자 가위로 절단되는 특정 손상된 부분을 보여주는 빛나는 DNA 이중 나선, 의학적 SF 개념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뒤집기를 하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며 뛰어다니는 모습은 부모에게 우주를 얻은 것 같은 기쁨을 준다. 그런데 서너 살 무렵부터 아이가 유독 자주 넘어지고, 또래보다 뛰는 것을 힘들어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성장통이나 발달이 늦은 줄 알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이는 결국 휠체어에 의존하게 되고, 십 대 후반이 되면 스스로 숨을 쉬는 호흡 근육마저 멈추어버린다. 몸속의 근육이 스펀지처럼 서서히 녹아내리며 말 그대로 아이가 '사라져가는' 이 무서운 질병의 이름은 '뒤센 근이영양증(Duchenne Muscular Dystrophy, DMD)'이다. 3,500명의 남자아이 중 한 명꼴로 발생하는 이 가혹한 희귀 유전병은, 세포 속 DNA에 찍힌 단 한 줄의 미세한 오타(돌연변이) 때문에 시작된다. 수십 년 동안 불치병으로 여겨지며 환자와 가족들을 절망의 늪에 빠뜨렸던 이 질병에, 최근 현대 생명과학의 궁극적 무기인 '유전자 가위' 기술이 등장하며 기적 같은 반전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근육을 갉아먹는 분자적 메커니즘과 이를 고치려는 유전자 치료의 위대한 도전을 들여다보자.

근육을 지탱하는 스프링, 디스트로핀

우리가 팔다리를 움직이고 심장을 뛰게 할 때, 근육 세포들은 고무줄처럼 격렬하게 수축하고 이완한다. 이때 근육 세포의 얇은 껍질(세포막)이 찢어지지 않도록, 내부의 뼈대와 외부 막을 단단하게 연결해 주는 용수철 같은 단백질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디스트로핀(Dystrophin)'이다. 뒤센 근이영양증 환자들은 X 염색체에 있는 이 디스트로핀 유전자에 치명적인 돌연변이가 생겨, 몸 안에서 디스트로핀 단백질을 아예 만들어내지 못한다. 용수철 끈이 끊어져 버린 셈이다. 그 결과, 근육을 쓸 때마다 세포막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며 터져버린다. 터진 세포 사이로 핏속의 칼슘이 쏟아져 들어와 근육 세포를 괴사시키고, 죽어버린 근육의 빈자리는 쓸모없는 지방과 흉터 조직(섬유화)으로 딱딱하게 채워진다. 아이가 커갈수록 겉으로는 종아리가 뚱뚱하고 튼튼해 보이지만(가성비대), 속은 이미 근육이 다 녹아내려 힘을 쓸 수 없는 기괴하고 잔인한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다.

건너뛰기의 마법, 엑손 스키핑

과거의 의학은 스테로이드를 투여해 근육이 파괴될 때 생기는 염증을 늦추어 생명을 몇 년 연장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유전학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디스트로핀 유전자는 무려 79개의 조각(엑손, Exon)이 기차처럼 연결된 거대한 암호문이다. 환자들은 이 기차의 중간(예: 50번 칸)에 오타가 생겨 기차가 멈춰버린 상태다. 과학자들은 세포가 유전자를 읽어 단백질을 만들 때, 고장 난 50번 칸과 51번 칸에 특수한 화학 물질(안티센스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을 반창고처럼 딱 붙여버려 눈가림을 하는 약물을 개발했다. 반창고가 붙어 있으면 세포는 이 고장 난 칸들을 아예 건너뛰고(Exon Skipping) 49번과 52번 칸을 이어 붙여버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백질은 중간이 조금 뭉툭하고 짧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절반의 용수철' 기능을 훌륭히 수행한다. 이 '엑손 스키핑' 신약(엑손디스 51 등)의 등장으로 환자들은 휠체어를 타는 시기를 획기적으로 늦출 수 있게 되었다. 근육 위축증을 나타내며 픽셀로 희미해지는 아이의 가슴 아프지만 시린 일러스트레이션

바이러스 택배로 배달하는 정상 유전자

엑손 스키핑 약물은 평생 수백만 원짜리 주사를 맞아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아예 한 번의 주사로 병의 뿌리를 뽑는 '유전자 치료(Gene Therapy)'로 눈을 돌렸다. 환자의 몸속에 '정상적인 디스트로핀 유전자'를 통째로 집어넣어 스스로 튼튼한 용수철을 만들게 하자는 것이다. 이때 유전자를 근육 세포 안으로 몰래 밀어 넣기 위한 배달부로 '아데노 연관 바이러스(AAV)'라는 무해한 바이러스를 이용한다. 바이러스의 뱃속에 독성을 빼고 정상 유전자를 꽉꽉 눌러 담아 주사하면, 수십조 개의 바이러스 택배들이 온몸의 근육 세포 안으로 침투하여 정상 유전자를 심어놓는다. 2023년 미국 FDA의 승인을 받은 유전자 치료제 '엘리비디스(Elevidys)'는 4~5세 아이들에게 투여되어, 죽어가던 근육 세포에서 정상 단백질이 극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디스트로핀 유전자의 크기가 워낙 거대해서 택배 상자(바이러스)에 다 들어가지 않아 핵심 유전자만 잘라 넣은 '미니 유전자(Micro-dystrophin)'를 쓴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크리스퍼(CRISPR), 근본적인 오타를 잘라내다

현대 의학의 종착역은 결국 망가진 유전자 자체를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잘라내고 꿰매버리는 3세대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카스9(CRISPR-Cas9)' 기술이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디스트로핀 유전자 기차에서 오타가 난 50번 칸의 정확한 위치를 내비게이션(가이드 RNA)으로 찾아간 뒤, 날카로운 효소 가위로 고장 난 DNA 사슬을 싹둑 잘라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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