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분자 진화

DNA와 단백질 서열의 변화를 통해 생물의 진화 역사를 추적하는 분자 진화학의 원리와 '분자 시계', 그리고 기무라 모토오의 '중립 진화 이론'을 알아본다.

편집부 · 2025년 1월 8일 · 읽는 데 4분

수백만 년에 걸쳐 형태를 바꾸고 가지를 뻗는 추상적인 이중 나선 DNA 가닥, 진화 계통수 개념
수백만 년에 걸쳐 형태를 바꾸고 가지를 뻗는 추상적인 이중 나선 DNA 가닥, 진화 계통수 개념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래, 생물학자들은 동물의 뼈 화석이나 새의 부리 모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특징(표현형)을 비교하며 진화의 역사를 추리해 왔다. 박물관에 전시된 공룡의 뼈나 시조새의 화석은 생명의 역사를 웅변하는 훌륭한 증거지만, 화석 기록은 곳곳이 끊어져 있는 낡은 책과 같아서 진화의 미세한 고리를 완벽하게 연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DNA 이중 나선 구조가 밝혀지고 생물학이 분자 수준으로 파고들면서 진화학은 상상도 못 한 거대한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생명체의 모든 진화의 역사와 조상들의 핏줄이 바로 세포 속 DNA의 A, T, G, C 네 가지 알파벳 서열과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 안에 고스란히 암호화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겉모습은 쥐와 코끼리처럼 완전히 달라도, 그들의 분자 지문을 비교해 보면 누가 언제 누구에게서 갈라져 나왔는지 가계도를 족집게처럼 그려낼 수 있다. 화석을 발굴하는 곡괭이를 버리고 컴퓨터의 시퀀싱 데이터로 생명의 계통수를 다시 그려나가는 경이로운 유전학적 고고학, '분자 진화(Molecular Evolution)'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돌연변이라는 잉크로 쓴 생명의 역사

분자 진화의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은 바로 '돌연변이(Mutation)'다. 세포가 분열할 때 DNA 복제 효소는 수십억 쌍의 염기 서열을 완벽하게 베껴 쓰려 노력하지만, 확률적으로 아주 미세한 오타(A가 G로 바뀌거나 염기 하나가 빠지는 현상)를 발생시킨다. 만약 이 오타가 생존에 치명적인 단백질 결함을 일으키면 그 개체는 죽어서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도태된다(자연 선택). 하지만 많은 경우 이 작은 오타들은 생존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고 유전자 속에 조용히 누적되어 자손 대대로 물려지게 된다.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두 생물 종의 유전자를 컴퓨터로 쭉 늘어놓고 알파벳을 비교해 본다. 만약 침팬지와 인간의 특정 단백질(예: 헤모글로빈) 유전자 서열이 99% 똑같고 오직 1%만 다르다면, 이 둘은 비교적 최근에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의미한다. 반면 쥐와 인간의 서열이 80%만 일치한다면, 이 둘은 침팬지보다 훨씬 더 까마득한 옛날에 조상이 갈라졌음을 보여준다. 유전자 서열에 찍힌 오타의 개수가 곧 두 생물이 얼마나 가까운 친척인지를 알려주는 분자 단위의 족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시간을 재는 메트로놈, 분자 시계

분자 진화학이 찾아낸 가장 획기적인 개념은 바로 '분자 시계(Molecular Clock)'다. 1960년대 에밀 주커캔들과 라이너스 폴링은 여러 동물의 헤모글로빈 단백질 아미노산 서열을 비교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척추동물들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단백질 서열에 오타(돌연변이)가 쌓이는 속도가 마치 째깍거리는 시계추처럼 수천만 년에 걸쳐 거의 일정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 단백질에서 100만 년마다 평균 1개의 아미노산 오타가 누적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치자. 이제 호랑이와 고양이의 해당 단백질을 비교해 보니 총 10개의 아미노산이 다르다면, 이 두 종은 약 1,000만 년 전에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와 각각 500만 년씩 독립적으로 진화해 왔다고 수학적으로 역산할 수 있다. 분자 시계 덕분에 생물학자들은 화석 기록이 전혀 없는 부드러운 해면동물이나 세균들이 수억 년 전 언제쯤 진화의 가지를 뻗었는지 연대 측정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생명의 가계도를 시간의 축 위에 완벽하게 배열할 수 있게 되었다. ATGC 서열이 변화하는 빛나는 분자 시계가 째깍거리는 과학적 시각화

다윈을 보완한 기무라의 중립 진화 이론

분자 진화학이 밝혀낸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하던 중, 1968년 일본의 집단 유전학자 기무라 모토오(Motoo Kimura)는 다윈의 진화론을 보완하는 폭탄 같은 이론을 발표했다. 이른바 '중립 진화 이론(Neutral Theory of Molecular Evolution)'이다. 다윈은 생물의 진화가 생존에 더 '유리한' 돌연변이만이 자연 선택을 받아 살아남는 치열한 적자생존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무라가 분자 수준에서 DNA를 뜯어보니, 쌓여 있는 돌연변이의 대부분은 생존에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완벽하게 '중립적(Neutral)'인 쓰레기 오타들이었다. 단백질의 기능을 전혀 바꾸지 않는 DNA의 쓸모없는 부위(비번역 부위)에 무작위로 오타가 쌓이면서 우연과 확률(유전적 부동)에 의해 생물 종이 갈라지고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기무라의 이론은 진화가 뚜렷한 목적이나 우열을 가리는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분자 단위에서는 단지 무심한 주사위 던지기처럼 일어난다는 사실을 입증하며 현대 진화 종합 이론의 가장 중요한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분자 시계가 일정한 속도로 똑딱거릴 수 있는 이유 역시, 이 돌연변이들이 생존의 압력을 받지 않는 중립적인 오타들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는 미토콘드리아 이브

분자 진화학의 칼날은 인류(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파헤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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