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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메이커 ‘이휘소’를 아십니까?

천재가 탄생하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아이가 바로 이휘소이다.

1935년 1월 1일 부부 의사인 이봉춘과 박순희 사이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바로, 이휘소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별나게 독서에 몰두했다. 이휘소는 동네 친구인 민희식의 집에서 수시로 책을 빌려 보았다. 『일본아동문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과학, 만화, 추리소설, 문학류의 책을 즐겨 읽었다. 독서로 쌓인 이휘소의 명석함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와 같은 중학교에 다닌 허용은 이휘소를 ‘국가대표 공부 선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예체능을 제외하고 어떠한 과목이든 거의 만점을 받았다. 그는 공부에서만 두각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과학 분야에서도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그가 속해있던 중학교 화학 반에는 화학 선생님을 능가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4학년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마저 이휘소를 인정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토론을 벌이곤 했다.

전쟁 중에도 책을 놓지 않던 아이

이휘소가 중학교 4학년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휘소의 가족은 1·4 후퇴 때 아버지 이봉춘의 고향인 충남 공주로 피란 갔다. 피란지에서도 이휘소는 늘 책에 매달려 살았다. 피란 때에는 꼭 필요한 물품만 가지고 오는 것이나, 아이들의 공부 책은 당연히 ‘꼭 필요한 물품’에 들어 있었다. 공주에서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의 옛 제자가 중공군이 내려오고 있다며 더 남하할 것을 권고했다. 아버지는 심사숙고 끝에 마산의 장군동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한다. 아버지도 창원보건소장에 취직하며 행복한 삶이 시작되려 하였지만, 이때 크나큰 불행이 닥쳤다. 직장 생활이 2년째 되던 1953년 어느 깜깜한 밤, 이봉춘은 귀가 도중 개울 둑에서 그만 실족하여 사망한다. 이후 혼자서 가족을 책임지게 된 어머니는 더욱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아이들의 학업에도 보다 열성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이 길어지자 이휘소는 위탁생이라는 이름으로 마산중학교에 임시 편입한다. 그러다 얼마 후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의논 끝에 경기중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친 이휘소는 검정고시로 길을 바꾸게 된다. (그가 갑자기 왜 이런 선택을 한 지는 명확지 않다. 아버지의 이른 부고로 인해 최대한 빨리 사회에 진출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일 수도 있고, 자기 수준에 맞는 교육 환경을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검정고시를 무난히 통과한 이휘소는 1953년 당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들이 지원한다는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이휘소는 처음으로 자취 생활을 시작한다.

물리와 사랑에 빠지다

그러나 이휘소는 얼마 되지 않아 자신과 맞지 않은 교육 환경에 실망하게 된다. 당시의 화학공학과 수업은 과학보다는 기술에 치중되어 있었다. 휴전 이후 산업 발전을 위해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응용 기술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 이후 일본인 교수들이 빠져나가고, 전쟁까지 겹치며 당시 대한민국에는 대학 교육에 적합한 교수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더욱이 교재도 변변치 않아, 강의는 교수가 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읽어주면 학생들이 받아쓰기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 만에 이휘소는 화학에서 물리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이휘소가 물리학에 자신을 가지게 된 일화가 하나 있다. 공과대학 3학년 당시 이휘소는 물리화학을 가르치는 전완용 교수와 함께 개인적으로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휘소는 미국의 물리학자가 쓴 양자역학 원서를 읽다가 계산이 이상한 부분을 하나 발견했다. 몇 번이고 계산해본 결과 그는 문제가 잘못되었음을 확신한다. 전완용과도 상의해본 결과, 그도 맞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휘소는 독후감과 함께 자신이 발견한 문제의 의견을 적어 저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저자로부터 답장이 왔다. “당신의 지적이 맞습니다. 내 책에 관심을 가져주고 오류까지 찾아주어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이휘소는 기뻐하며 친구들에게 답장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이휘소는 물리에 길을 갈 것을 마음먹고, 학교에 물리로 전과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금도 힘든 전과를 제도 자체가 없던 당시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낯선 환경, 힘든 생활

물리학과로의 전과가 실패하자 이휘소는 화학공학과 수업을 받으며 독학으로 물리를 공부해 갔다. 그러던 중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원조 대상 국가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가 후원하여 장학금까지 지급하는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최우수 학생이었던 이휘소는 시험에 합격했고, 오하이오주 옥스퍼드시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정식으로 마이애미 대학의 학생이 된 이휘소 앞에는 학점 인정이라는 커다란 관문이 남아있었다.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3년의 과정을 마이애미 대학에서 얼마나 인정해 줄 것인 가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다행히 마애이미 대학은 서울대학교에서 취득한 학점 중 70학점을 인정해주어, 어학 관련 학점을 제외하고는 3학년 과정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학교생활에 매사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쏟아지는 숙제에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에서 숙제를 다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자정이 넘기 일쑤였다. 특히 영어, 독일어와 같은 어학 수업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늘 시간에 쫓기며 몸도 마음도 피로해졌다. 그러나 바쁜 와중에도 이휘소는 사나흘에 한 번씩 꼭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가 아닌 생활보고문이라도 쓰듯 학교생활의 전반을 세세하게 적어 보냈다. 유학 초기, 이휘소에게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돈’이었다. 어머니가 기본적인 생활비를 송금해주셨지만, 어머니의 수입만으로는 줄줄이 딸린 동생들의 학비를 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기에 식비, 책값, 우편요금, 세탁비 등 일상 잡비를 마련하는 데 늘 짓눌려 있었다. 공부에 전념하라는 어머니의 간고한 부탁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입학 두어 달 만에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돈벌이 일을 하면서도 우등이라면 얼마나 장합니까? 공부도 가일층 노력해 학기 말에 전부 A로 해보겠습니다.’ 이 무렵 이휘소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남다른 학생

4학년 가을학기가 시작되며 수업과 공부 이외에 마음을 빼앗길 시간은 사라져갔다. 이 학기는 특별히 중요한 전공 필수 과목들을 수강하기 때문이다. 10월이 되며 이휘소에게 첫 번째 시험인 중간시험이 다가왔다 이휘소는 잠자는 시간을 대폭 줄여가며 밤낮없이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영어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새해가 지나고 봄학기가 시작되었다. 이휘소에게 있어 마이애미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였다. 이때 이휘소는 현대대수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스내퍼(Snapper) 교수가 진행했던 현대대수학 강의에는 대학원생까지 포함하여 모두 20명의 학생이 있었다. 수학 전공이 아닌 학생들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공식, 방대한 계산 과정을 수반하는 숙제, 빠르게 진행되는 강의, 결국 강의 한 달 만에 절반의 학생이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자 강의실에는 이휘소와 스내퍼 교수만 남게 되었다. 얼마 후 현대대수학 강의도 끝났다. 이휘소는 끝까지 남았고, 스내퍼 교수도 하나뿐인 학생에게 열정적으로 강의하였다. 이휘소는 시험에서도 매우 우수한 성적을 내었고, 캠퍼스에는 이휘소가 유난히 공부를 잘한다는 소식이 퍼졌다. 학기가 끝나고, 며칠 뒤 대학원 지망생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 시범을 보이는 구두시험이 있었다. 이휘소는 문제의 핵심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설명하는 일에도 능했기에 에드워즈 물리학과장의 눈에 띄게 되었다. 강의 시범이 끝나고 에드워즈는 이휘소에게 대학원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제안했다. 이휘소는 하버드와 위스콘신, 피츠버그 대학원 사이에서 고민하다 졸업이 한 달쯤 남았을 때 다시 에드워즈를 찾아갔다. 그의 고민을 들은 에드워즈는 피츠버그에 추천장을 써주었다. 이휘소는 얼마 후 마이애미 대학을 최고 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하였고, 피츠버그 대학원에서는 입학 허가와 함께 교육 조교(TA) 장학금을 통지받았다. 피츠버그 대학원에서 이휘소는 이론물리학으로 마음을 잡았다. 아마 마이애미 대학에서 받은 전자물리 수업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많은 실험을 해봤던 이휘소지만, 전자 회로를 다루는 면에서는 어려서부터 몸에 밴 미국 학생들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러나 수학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유독 강했기에 논리적 전개를 통해 새로운 이론을 정립해나가는 것에 더 매력을 느꼈다.

최고의 은사를 만나다.

피츠버그에서도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이휘소는 양자 벌판 이론을 전공하고 싶다고 담당 교수에게 물었고, 거조이(Gerjuoy) 교수를 추천받았다. 그러나 가을학기가 끝나고 거조이는 1년간 방문 교수로 학교를 떠나는 사정이었다. 거조이는 이를 걱정하는 이휘소를 불러 다른 대학원으로 전학갈 것을 권고했다. 우수한 학생을 자신의 학교에 두려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그를 다른 대학원으로 보내려 할 정도로 그의 장래를 생각해주는 마음에 이휘소는 뭉클해졌다. 그리고 이휘소는 박사 과전을 염두에 두고 피츠버그에서 자격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두달 간 ‘미친 듯이’ 공부한 끝에 차석과는 총점이 무려 20점 이상 차이나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하게 되었다. 이휘소는 바로 석사 학위 논문에 매진했고, 한 달쯤 후 「산란 행령의 해석성과 그 응용(On the Analytic Properties of the Scattering Matrix with Some Applicatio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시켰다. 그 후 이를 다듬고 분산 관계를 추가해 「비상대론적 퍼텐셜 산란에서의 분산 관계」라는 논문을 써 『물리평론(Physical Review』라는 물리학술 전문지에 기고하였다. 석사 학위 논문이 이렇게 저명한 학술지에 게재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논문이 통과되어 이제는 박사 과정을 어떻게 준비할지 결정할 때였다. 그러나 지도 교수인 거조이 교수가 떠난 상태여서 이휘소는 매우 남간했다. 지도 교수가 말한 전학 문제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그 전해에 수업을 들었던 매슈커프가 이휘소의 재능을 아까워하여 펜실베니아 대학의 클라인(A. Klein0 교수에게 추천해주었다. 그렇게 이휘소는 입학지원서를 제출하지 않았음에도 펜실베니아 대학으로부터 조교 임명 통지를 받았다.

모두의 인정을 받다

이후 펜실베니아대에서 「K 중간자 산란과 분산 이론」, 「핵자와 K 중간자 산란 과정에서 2개 파이온 입자 교환 과정」, 「 산란에서 p-파동 공명 현상」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박사 학위와 함께 졸업하였다. 수준 높은 논문들은 학계의 호평을 받았고, 대학원생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물리학 세미나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졸업 1년 후 괴델(Godel), 오펜하이머(Oppenheimer), 폰 노이만(von Neumann)등 거장들이 몸 담은 미국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한국인으로는 고등연구원 자연과학부의 첫번째 연구회원이었다. 이휘소의 노력과 독창적인 사고는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1973년 세계적인 연구소로 도약하던 페르미 연구소의 초대 이론물리학부 부장에 취임하며 입자물리계의 정상에 서게 된다.

노벨상 메이커

비록 이휘소가 노벨상을 수상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놀라운 업적은 직간접적으로 동료들의 노벨상 수상을 만들었다. 1970년 여름, 지중해 코르시카 섬에 있는 카쥐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최된 하계 입자물리학교에 이휘소는 강연자로 초대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휘소는 자연 대칭 파괴와 재규격화에 관해 강의하였다. 그 자리에는 벨트만 교수의 논문 지도를 받는 대학원생 토프트가 있었다. 그는 지도 교수인 벨트만과 함께 ‘양-밀스 게이지 이론 ‘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휘소의 강연을 들은 토프트는 벨트만의 방법보다 이휘소가 시도하고 있는 겔만-레비 모형 이론에 대한 양자 현상 접근 방법이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휘소와의 문답을 거친 토프트는 벨트만을 설득하였고, 결국 겔만-레비 모형의 자연 대칭 파괴와 양-밀스 이론을 종합해 자연 파괴하는 게이지 대칭을 가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성공하게 된다. 이 공로로 토프트와 벨트만은 199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여기서 재규격화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다. 전자기 작용을 양자화한 양자 전자기학에서 어떤 물리량(이를테면 전자의 자성)을 계산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무한대가 된다. 이는 물리 이론으로서의 에측 가능성이 없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무한대의 발생 가능성을 없애는 것을 재규격화라 한다.

이휘소는 살람(Salam)의 노벨상 수상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1974년 여름, 영국 런던에서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가 열렸다. 당시에는 와인버그 모형이 통용되고 있었다. 국제회의 강연 전날 쉬고 있던 이휘소에게 살람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도 와인버그와 똑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으나, 사람들이 본인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하였다. 그의 의견 심사숙고한 이휘소는 다음 날 강연에서 ‘와인버그 모형’이 아닌 ‘와인버그-살람 모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후 학계에서는 ‘와인버그-살람 모형’이라는 이름이 통용되었다. 살람은 와인버그, 글래쇼와 함계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하게 되었다. 그 이외에도 와인버그의 ‘경입자 모형’ 이론, 리히터와 팅의 ‘참 입자 발견’, 그로스, 윌첵, 폴리처의 ‘점근 자유 이론’의 노벨상 수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물리학계의 별이 되다

1977년 6월 16일 그 일이 일어났다. 이휘소는 콜로라도의 아스펜 물리연구센터의 학회와 페르미 연구소 자문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승용차에 올랐다. 전날밤 밤 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했던 탓인지 당일 출발은 예정보다 늦어졌다. 때문에 시간이 다급하여 고속도로에서는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이휘소의 차가 고속도로 I-80을 지나던 그 때였다. 반대푠 도로에서 마주 달려오던 대형 트럭이 고장 나면서 순식간에 중앙의 분리 지역을 넘어왔다. 이휘소의 승용차는 트럭 정면과 비스듬히 충돌하고, 이휘소는 앞창 유리를 지탱하는 철제 창틀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아내와 가족은 경상에 그쳤지만 이휘소는 병원에 옮겨졌지만 끝내 숨지고 말았다. 물리학계는 충격에 빠졌다. 이휘소는 그의 인생의 절정에서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타계하고 말았다. 그가 근무하던 페르미 연구소에는 조기가 걸렸고, 영결식은 6월 21일에 거행되었다. 이휘소에게는 동백장 훈장이 수여되었고, 그의 어머니가 대신 받았다. 이후 2006년 과학기술부가 지원하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주관하는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최무선, 장영실, 허준과 함께 헌정되었다.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내용
 

김지훈 학생기자 | Physics & Earth Science| 지식더하기


참고자료

[1] 강주상, 『이휘소평전』, 럭스미디어, 2006년

[2] 공석하, 『로스트 이휘소』, 동서문화사, 2010년

[3] 이은유, 『현대 물리학의 별 이휘소』, 자음과 모음, 2012년

ⓒ KAIST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온라인 과학매거진 KOS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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