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세포 속 액체방울로 게놈을 조절한다

물과 기름이 분리되듯 세포 핵 안에서 액체방울(상분리) 현상이 발생하여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놀라운 3차원 유전자 조절 메커니즘을 탐구한다.

편집부 · 2024년 1월 5일 · 읽는 데 4분

현미경 예술, 물속의 기름처럼 내부에 떠다니고 합쳐지는 작고 생생한 색상의 액체 방울이 있는 빛나는 생물학적 세포핵
현미경 예술, 물속의 기름처럼 내부에 떠다니고 합쳐지는 작고 생생한 색상의 액체 방울이 있는 빛나는 생물학적 세포핵

우리의 세포는 물풍선과 같다. 그 안에는 물과 온갖 단백질, 그리고 생명의 설계도인 30억 쌍의 DNA가 둥둥 떠다니는 혼돈의 수프처럼 보인다. 과거 생물학자들은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 즉 단백질들이 서로 만나고 유전자 스위치를 켜는 과정이 마치 수영장에 풀어놓은 물감처럼 무작위로 부딪혀서 일어난다고 믿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세포 분열이나 암 발생처럼 생사의 갈림길을 결정짓는 초정밀 유전자 스위치가 그저 분자들의 '우연한 만남'에 의해 조종된다면 생명체는 진작에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2010년대 중반, 과학자들은 현미경 속 세포 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기존의 생물학 교과서를 모조리 찢어버려야 할 충격적인 현상을 목격했다.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들이 자기들끼리 뭉쳐 거대한 방울을 만들듯, 세포 안에서 특정 단백질과 유전자들이 순식간에 뭉쳐 '액체방울(Liquid Droplet)'을 형성하고, 그 물방울 안에서만 엄청난 속도로 생명 반응을 뚝딱뚝딱 끝내버리는 마법을 발견한 것이다. 21세기 세포생물학의 가장 위대한 혁명으로 불리는 '생체 상분리(Phase Separation)'의 끈적끈적한 세계로 들어가 보자.

세포 속에 떠다니는 임시 공장, 상분리 현상

드레싱 소스(물과 식초)에 올리브오일을 붓고 마구 흔들면 일시적으로 뿌옇게 섞이는 듯하다가, 조금만 놔두면 기름은 기름끼리 뭉쳐 투명한 액체방울로 둥둥 떠오른다. 물리화학에서 이를 '액체-액체 상분리(LLPS)'라고 부른다. 놀랍게도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도 1초 만에 이 기름방울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기괴한 현상이 일어난다. 세포 안을 둥둥 떠다니던 수백 개의 특정 단백질(무질서 단백질)과 RNA 조각들이 어떤 신호를 받으면, 갑자기 자기들끼리 끈끈하게 엉겨 붙으며 막(껍질)도 없는 투명한 '물방울 텐트'를 친다. 세포 전체에 넓게 퍼져있으면 서로 만나기 힘들지만, 이 좁고 끈적끈적한 물방울(응집체) 방 안으로 쏙 들어가면 분자들의 농도가 수백 배로 뻥튀기된다. 부품들이 공장 안에 빽빽하게 모여 있으니 1시간 걸릴 화학 반응(예: 리보솜 조립)이 불과 1초 만에 폭발적으로 끝난다. 볼일이 다 끝나면 물방울은 다시 스르르 녹아 없어지며 텐트를 철거해 버린다. 세포는 필요할 때마다 허공에 막 없는 임시 공장을 짓고 부수는 경이로운 공간 예술가였던 것이다.

물방울이 유전자(DNA) 스위치를 켠다

이 상분리 물방울의 가장 위대한 마술은 우리 몸의 핵심 설계도인 'DNA 유전자'를 통제한다는 데 있다. 인간의 DNA는 길이가 무려 2미터에 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핵 안에 실타래처럼 꽁꽁 뭉쳐(크로마틴 구조) 욱여넣어져 있다. 평소에는 유전자가 숨겨져 있어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특정 단백질들이 유전자 근처로 몰려와 거대한 '액체방울'을 형성하며 유전자 실타래를 물방울 안으로 집어삼킨다. 끈적끈적한 물방울 안에서 DNA 밧줄이 스르륵 풀어지며 그 속에 적힌 암호(유전자)가 복사(전사)되기 시작한다. 반대로 어떤 물방울은 밧줄을 아예 시멘트처럼 꽉 뭉쳐버려 유전자 스위치를 영원히 꺼버리기도(이질염색질) 한다. 인간을 비롯한 고등 생명체는 세포 안의 거대한 화학 공장을 통제하기 위해, 유전자(게놈)들을 무작위로 방치한 것이 아니라 3차원의 물방울 텐트 속에 가두어 정밀하게 껐다 켰다 하는 궁극의 제어 시스템을 발명해 낸 것이다. 유전자 조절을 나타내는 떠다니는 빛나는 물방울 안팎으로 감겨 있는 DNA 가닥을 보여주는 초현실적인 다이어그램

알츠하이머와 루게릭병, 굳어버린 물방울의 비극

세포의 완벽한 임시 공장인 상분리 물방울은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다. 텐트를 세웠으면 1초 뒤에 스르르 녹아 없어져야 정상인데, 단백질에 유전적인 돌연변이가 생기거나 늙어버리면 이 액체방울이 녹지 않고 딱딱한 고체 덩어리(응집체)로 굳어버리는 끔찍한 에러가 발생한다. 꿀물처럼 끈적여야 할 물방울이 돌멩이로 굳어버리니 세포 안의 물질 이동이 꽉 막혀버리고, 결국 뇌 신경세포 전체가 펑 터져 죽고 만다. 이것이 바로 파킨슨병, 루게릭병(ALS),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 속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비극의 진짜 원인이다. 뇌 속의 치명적인 독성 찌꺼기(아밀로이드 덩어리)는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원래는 1초 만에 녹아 없어져야 했을 정상적인 '상분리 물방울'이 굳어버린 화학적 무덤이었던 것이다.

불치병 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

상분리의 발견은 제약 산업의 판도를 뒤집고 있다. 기존의 치매약이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돌멩이(아밀로이드 찌꺼기)를 폭파하는 데만 집중하다 모조리 실패했다면, 이제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과학자들은 액체방울이 돌멩이(고체)로 굳어버리는 그 '찰나의 상전이 순간'을 막아내는 화합물(분자 접착제 등)을 찾고 있다. 끈적끈적한 물방울이 유연성을 잃지 않도록 화학적 윤활유를 뿌려 알츠하이머와 루게릭병의 근본 원인을 차단하려는 상분리 기반 신약 벤처들이 전 세계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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