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을 실험실에서 만든다고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에서 입자들을 충돌시켜 미니 블랙홀을 만든다는 과학적 가설과, 이것이 지구를 삼킬 것이라는 공포의 진실을 규명한다.
편집부 · 2021년 4월 2일 · 읽는 데 4분
2008년 9월, 스위스 제네바 지하 100미터에 위치한 둘레 27km의 거대한 원형 터널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싼 실험 장치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가 처음 가동되는 날이었다. 과학자들은 빅뱅 직후 우주의 상태를 재현하기 위해 이 터널 안에서 양성자들을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정면충돌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실험을 앞두고 전 세계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심지어 가동을 중단해 달라는 소송이 제기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유는 단 하나, 일부 물리학자들이 제기한 끔찍한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양성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로 쾅 하고 부딪히는 순간, 그 좁은 점(특이점)에 에너지가 극도로 밀집되면서 실험실 안에 '미니 블랙홀'이 생성될 수 있다는 가설이었다. 음모론자들은 이 인공 블랙홀이 제네바를 시작으로 결국 지구 전체를 집어삼켜 멸망을 부를 것이라고 공포에 떨었다. 인류가 스스로 지옥의 문을 여는 것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던 '실험실 블랙홀' 논란, 과연 그 안에 담긴 물리학적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지구 파괴의 도박을 걸었던 물리학자들의 통쾌한 해명을 들어보자.
우주의 괴물, 지구에서 빚어지나
LHC 반대론자들이 공포에 떤 이유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 제시한 블랙홀의 생성 조건 때문이었다. 블랙홀은 꼭 태양보다 질량이 수십 배 무거운 별이 죽을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어떤 물질이든 질량을 극도로 좁은 공간에 압축시켜 밀도를 무한대에 가깝게 만들면 사건의 지평선(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이 생기며 블랙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구 전체를 탁구공만 한 크기로 짓누르거나, 에베레스트산을 원자 크기로 압축하면 그 찰나의 순간에 블랙홀이 만들어진다. LHC의 실험은 바로 이 원리를 극단적으로 모사한 것이다. 빛의 속도의 99.999999%로 날아가는 양성자 두 개가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면, 두 입자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운동 에너지(E=mc²)가 충돌 지점이라는 극히 미세한 점 하나에 집중된다. 일부 끈 이론가들과 잉여 차원(Extra Dimensions) 이론을 믿는 입자물리학자들은,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고차원 공간이 존재한다면 충돌 에너지가 이 차원들로 새어 나가면서 중력이 국소적으로 극대화되어 아주 조그마한 '마이크로 블랙홀(Micro Black Hole)'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지구를 집어삼킬 괴물을 빚어낸다는 공포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호킹 복사, 태어나자마자 증발하는 블랙홀
하지만 대다수의 주류 물리학자들은 이 공포가 과학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넌센스라고 일축했다. 가장 강력한 방패는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이 제안한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 이론이었다. 호킹은 양자역학을 이용해 블랙홀이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완전한 감옥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에너지를 방출하며 서서히 증발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중요한 것은 블랙홀의 질량이 작을수록 이 증발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빠르다는 것이다. 태양만 한 블랙홀이 증발하려면 우주 나이의 수만 배가 걸리지만, LHC에서 기적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마이크로 블랙홀의 질량은 고작 양성자 몇천 개를 합친 수준에 불과하다. 호킹 복사 방정식에 따르면, 이 정도 크기의 초소형 블랙홀은 생성되자마자 10의 -27승 초(0.000...01초)라는 찰나의 윙크할 시간도 안 되는 순간에 스스로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폭발하며)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다. 주변의 물질(지구)을 빨아들일 시간조차 없이 빛으로 소멸해 버리기 때문에, 블랙홀이 스위스를 집어삼킬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주선(Cosmic Ray)이라는 천연 입자 가속기
물리학자들의 두 번째 반박은 우주의 역사가 증명하는 통계학적 사실이었다. 인간이 제네바 지하에 27km짜리 튜브를 뚫고 막대한 전기를 쏟아부어 양성자를 가속시킨다 한들, 대자연의 스케일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 우주에서는 초신성 폭발이나 펄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고에너지 입자(우주선, Cosmic Ray)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다 끊임없이 지구의 대기권에 충돌하고 있다. 이 자연의 입자 가속기가 만들어내는 충돌 에너지는 CERN의 LHC가 낼 수 있는 최대 에너지보다 무려 수만 배에서 수백만 배나 더 강력하다. 만약 잉여 차원 이론대로 고에너지 입자 충돌로 위험한 마이크로 블랙홀이 쉽게 만들어진다면, 지구 대기권 상층부에서는 이미 45억 년 전 지구 탄생 이래 매일 수천만 개의 블랙홀이 쏟아지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지구는 멀쩡히 살아남아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달과 다른 행성들 역시 블랙홀에 먹히지 않았다. 우주 자체가 거대한 실험실로서 입자 충돌의 안전성을 45억 년 동안 온몸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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