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모브 mauve 19세기를 매료시키다

실패한 말라리아 치료제 연구에서 우연히 탄생한 최초의 인공 합성 염료 '모브'가 화학 산업과 패션계에 일으킨 혁명을 살펴본다.

편집부 · 2023년 9월 13일 · 읽는 데 4분

눈부신 모브 퍼플 색으로 염색된 빅토리아 시대의 빈티지 드레스
눈부신 모브 퍼플 색으로 염색된 빅토리아 시대의 빈티지 드레스

색깔은 오랫동안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특히 황제나 귀족들만이 입을 수 있었던 보라색(Purple)은 지중해의 특정한 뿔고둥 수만 마리를 잡아야 겨우 몇 그램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값비싸고 희귀한 염료였다. 평민들은 평생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이 영롱한 보라색을 19세기 중반 영국 런던의 거리에서 누구나 입고 다니게 만든 기적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이 혁명은 값비싼 고둥이나 희귀한 식물이 아니라, 더럽고 악취 나는 석탄 찌꺼기인 '콜타르(Coal tar)'에서 시작되었다. 1856년, 18세의 젊은 화학도 윌리엄 헨리 퍼킨(William Henry Perkin)은 말라리아 치료제를 합성하려다 우연히 실패한 실험 플라스크 속에서 짙은 보라색 찌꺼기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 합성 염료인 '모브(Mauve, 모브인)'의 탄생이었다. 모브의 등장은 단순히 패션계에 새로운 색을 추가한 것을 넘어, 화학이라는 학문이 상업적 가치를 지닌 거대한 산업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우연한 실패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발명품, 모브의 화학적 비밀과 그것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따라가 보자.

말라리아 치료제 키닌의 합성 시도

19세기 대영제국은 식민지 확장을 위해 열대 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당시 병사들을 괴롭힌 가장 큰 적은 말라리아였다. 말라리아의 유일한 치료제는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자라는 기나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키닌(Quinine)'이라는 성분이었는데,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여 가격이 금값보다 비쌌다. 영국 왕립화학대학의 저명한 화학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호프만은 제자인 윌리엄 퍼킨에게 값싼 석탄 폐기물인 콜타르에서 키닌을 인공적으로 합성해 보라는 과제를 내렸다. 당시의 화학은 분자의 구조적 배열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원자의 개수를 더하고 빼서 화합물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다소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퍼킨은 콜타르에서 추출한 톨루이딘 화합물에 산소와 수소를 더해 키닌을 만들려 했지만, 결과물은 치료제는커녕 플라스크 바닥에 눌어붙은 끈적이고 시커먼 찌꺼기뿐이었다. 일반적인 연구자였다면 당장 플라스크를 씻어버렸겠지만, 호기심 많은 퍼킨은 이 검은 찌꺼기를 에탄올로 씻어보았다. 그러자 찌꺼기가 녹으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강렬한 보라색 용액으로 변했다.

실크를 물들인 기적의 색상

퍼킨은 이 보라색 용액이 단순한 불순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헝겊을 용액에 담갔다 빼보았고, 헝겊은 눈부신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물든 천을 뜨거운 물로 빨거나 강한 햇빛에 널어 두어도 색이 전혀 빠지거나 바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얻는 식물성 염료들은 쉽게 탈색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퍼킨이 만든 화학 염료는 섬유 분자와 강력하게 결합하여 영구적인 색상을 자랑했다. 퍼킨은 이 물질에 프랑스어로 은방울꽃을 뜻하는 '모브(Mauve)'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업적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지도교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세의 나이에 학교를 자퇴하고 아버지와 형의 도움을 받아 세계 최초의 합성 염료 공장을 세웠다. 때마침 프랑스의 외제니 황후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모브 색상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면서, 모브는 유럽 사교계와 대중 패션에 폭발적인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모브 홍역(Mauve Measles)'이라 불릴 정도로 모든 여성들이 퍼킨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보라색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어두운 실험실 배경에서 보라색으로 빛나는 모브인의 화학 구조를 담은 플라스크

유기화학 산업의 폭발적 성장

모브의 상업적 대성공은 과학자들과 사업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쓸모없는 산업 쓰레기 취급을 받던 콜타르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둔갑한 것이다. 퍼킨의 성공을 지켜본 수많은 화학자들이 콜타르를 분석하여 새로운 색깔의 합성 염료를 만들기 위한 연구에 뛰어들었다. 불과 몇 년 만에 마젠타(자홍색), 알리자린(붉은색), 인디고(푸른색) 등 자연에서 얻기 힘들었던 화려한 색상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모브의 탄생은 독일을 중심으로 거대한 유기화학 및 정밀화학 산업(Chemical Industry)이 태동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BASF, 바이엘, 훽스트 같은 현재의 세계적인 화학 기업들도 모두 19세기에 합성 염료를 만들기 위해 설립된 회사들이다. 학문적 상아탑에 머물러 있던 화학이 인간의 실생활을 극적으로 바꾸고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실용적인 응용 학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염료 산업의 발전은 이후 의약품, 플라스틱, 폭약 등 현대 화학 산업의 모든 분야를 파생시키는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의학의 발전과 염색 기술의 공헌

합성 염료는 패션 산업을 넘어 생명과학과 의학의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세기 말 미생물학자들은 세균을 현미경으로 관찰할 때 세균이 투명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파울 에를리히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모브를 비롯한 콜타르 유도체 염료들이 특정 세균의 세포벽에만 달라붙어 색을 띠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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