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지식더하기 환경이 유전자를 바꾼다 _네덜란드 대기근

굶주림이라는 가혹한 환경이 단순히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넘어, 태아의 DNA 스위치를 강제로 조작하여 후대까지 유전되는 '후성유전학'의 충격적 진실을 다룬다.

편집부 · 2025년 5월 21일 · 읽는 데 4분

후성유전학, 왼쪽에는 기근 동안 임신한 여성이 있고 오른쪽에는 건강하지만 비만인 미래의 손주와 빛나는 DNA 나선으로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는 시각적으로 놀라운 개념적 초상화
후성유전학, 왼쪽에는 기근 동안 임신한 여성이 있고 오른쪽에는 건강하지만 비만인 미래의 손주와 빛나는 DNA 나선으로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는 시각적으로 놀라운 개념적 초상화

생물학의 절대 진리는 "후천적으로 얻은 특징(획득 형질)은 절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린이 목을 길게 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목이 긴 새끼가 태어나지 않으며, 내가 보디빌더가 되어 근육질이 되었다고 내 아이가 근육질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유전자(DNA)라는 설계도는 부모에게서 받은 글자 그대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네덜란드에서 이 절대 진리를 산산조각 내는 기괴한 의학적 통계가 쏟아져 나왔다. 1944년 겨울, 나치의 봉쇄로 네덜란드 전역이 끔찍한 대기근(굶주림)에 휩싸였는데, 그때 임신 중이었던 산모들이 낳은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 비정상적인 당뇨병과 고지혈증에 시달렸고, 충격적이게도 그 아이들의 '자녀(손주 세대)'들까지 똑같은 질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내가 굶은 환경이 어떻게 유전자를 뚫고 손주에게까지 전달된 걸까?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소름 돋는 진실을 파헤쳐 보자.

가혹한 환경이 누른 스위치, DNA 메틸화

임산부가 굶어 죽어갈 때, 뱃속의 태아는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아! 내가 태어날 바깥세상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지옥이구나!" 태아의 몸은 살아남기 위해 기괴한 화학 작업을 시작한다. DNA 설계도의 글자(염기 서열)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 글자를 읽지 못하게 그 위에 '메틸기(Methyl)'라는 화학적 딱지(형광펜)를 덕지덕지 붙여버린다(DNA 메틸화). 메틸기가 붙은 유전자는 스위치가 꺼져버려 작동을 멈춘다. 태아는 뱃속에서 신진대사 스위치를 싹 다 꺼버리고, 영양분이 아주 찔끔 들어와도 절대 태워 없애지 않고 악착같이 지방으로 바꿔 몸에 욱여넣는 '기아 생존 모드'로 자신의 유전자를 강제로 리프로그래밍해 버린 것이다.

풍요로운 세상에서의 끔찍한 부작용

문제는 이 아이가 태어난 이후였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에는 햄버거와 빵이 넘쳐나는 풍요로운 시대가 왔다. 하지만 아이의 유전자는 여전히 '지옥의 굶주림 모드'에 스위치가 맞춰져(메틸화) 있었다. 몸은 평범한 식사를 해도 "언제 또 굶을지 몰라! 무조건 지방으로 저장해!"라며 미친 듯이 에너지를 축적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 대기근 시절 뱃속에 있던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끔찍한 고도 비만과 당뇨, 조현병에 압도적인 비율로 시달리게 되었다. 환경(기근)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돌이킬 수 없이 조작해 버린 것이다. 왼쪽에는 표준 유전학을 DNA의 고정된 석판으로 보여주고, 오른쪽에는 환경적 스트레스에 의해 켜지고 꺼지는 빛나는 화학 스위치(메틸화)로서의 '후성유전학'을 보여주는 분할 화면

손주에게 이어지는 저주, 세대 간 유전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 메틸화 스위치(딱지)가 자식 세대에게 생식 세포를 통해 그대로 대물림되었다는 점이다. 기근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손주들마저 할머니가 굶주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만과 당뇨 스위치가 켜진 채 태어난 것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자연 선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후천적인 환경의 트라우마가 유전자를 통해 세습된다는 사실을 생물학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유전자는 정해진 운명이 아니다

이 기괴한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라고 부른다. 이는 역설적으로 엄청난 희망이다. 내가 부모에게 암 유전자나 비만 유전자를 물려받았더라도 그것은 '켜질 수도 안 켜질 수도 있는 스위치'에 불과하다. 내가 오늘 담배를 끊고 브로콜리를 먹으며 운동을 하면, 내 몸의 화학 물질들이 암 유전자 위에 찰싹 달라붙어 스위치를 영구적으로 꺼버릴(메틸화) 수 있기 때문이다. 히스톤 단백질을 꽉 감싸고 있는 DNA 가닥의 미세한 다이어그램으로, 굶주림으로 인해 특정 유전자를 강제로 억눌러 영구적으로 침묵시키는 빨간색 '메틸 태그'가 있습니다

남은 과제

후성유전학은 아동 학대나 전쟁 같은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조차 뇌세포의 유전자 스위치를 조작하여 후대에게 우울증으로 대물림될 수 있다는 서글픈 뇌과학적 증거를 쏟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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