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지식더하기 장 피에르 소바주 노벨 화학상 수상까지의 여정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들을 사슬처럼 엮어(카테네인) 스스로 움직이는 최초의 '분자 기계'를 탄생시킨 2016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장 피에르 소바주의 업적을 조명한다.

편집부 · 2024년 5월 5일 · 읽는 데 4분

초분자 화학, 체인의 고리처럼 물리적으로 서로 고정된 빛나는 상호 연결된 두 개의 분자 고리(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빨간색)를 보여주는 '카테네인'의 매우 상세한 3D 분자 청사진
초분자 화학, 체인의 고리처럼 물리적으로 서로 고정된 빛나는 상호 연결된 두 개의 분자 고리(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빨간색)를 보여주는 '카테네인'의 매우 상세한 3D 분자 청사진

화학자들의 전통적인 임무는 원자와 원자를 '공유 결합'이라는 강력한 본드로 딱 붙여 새로운 약이나 플라스틱을 만드는 것이었다. 본드로 붙인 분자들은 단단하지만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뻣뻣한 조각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1983년, 프랑스의 괴짜 화학자 장 피에르 소바주(Jean-Pierre Sauvage)는 아주 기상천외한 딴짓을 시작했다. "분자를 본드로 꽉 붙이지 말고, 마치 마술사의 링이나 열쇠고리처럼 두 개의 분자 고리를 물리적으로 얽어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미터 세계에서 최초로 분자들을 사슬처럼 엮어냈고, 이 사슬은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서로 빙글빙글 자유롭게 돌아가는 '기계적인 관절'을 갖게 되었다. 2016년 노벨 화학상을 거머쥔 최초의 분자 톱니바퀴, 소바주의 '카테네인(Catenane)' 탄생 비화를 들여다보자.

본드를 버리고 사슬을 짜다, 초분자 화학

두 개의 둥근 분자 고리를 체인처럼 엮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분자들은 자석처럼 서로 밀어내거나 지들끼리 엉겨 붙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소바주 이전의 화학자들은 플라스크에 수십억 개의 분자를 때려 넣고 우연히 두 개가 고리처럼 엮이기를 기도하는 미련한 짓을 했다(성공률 1% 미만). 하지만 소바주는 천재적인 꼼수를 썼다. 그는 가운데에 플러스 전기를 띤 '구리 이온(Cu)'을 기둥으로 세워놓고, 구리 이온을 좋아하는 반쪽짜리 고리 분자들을 주변에 끌어모았다. 구리 기둥 주변에 반쪽 고리들이 예쁘게 모여들자, 그 끝을 슬쩍 연결하여 완벽하게 얽힌 두 개의 사슬 고리를 단숨에 찍어냈다(수율 42%). 화학의 역사상 최초로 우연이 아닌 '설계도'를 통해 분자 사슬을 대량 생산해 낸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고리, 카테네인(Catenane)

이렇게 엮어낸 두 개의 분자 사슬을 '카테네인(라틴어로 사슬)'이라고 부른다. 카테네인의 가장 위대한 점은 '움직임'이다. 이 두 고리는 원자끼리 꽉 붙어있는(공유 결합)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훌라후프 2개가 겹쳐 있듯이 서로 미끄러지며 빙글빙글 회전할 수 있다. 인류가 화학 플라스크 속에서 쇳덩어리가 아니라 분자로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작은 관절이자 '톱니바퀴'가 탄생한 것이다. 왼쪽에는 부두에 단단히 연결된 거대하고 무거운 강철 닻 사슬을 보여주고, 오른쪽에는 액체 플라스크에 떠 있는 10억 배 더 작은 미세한 분자 사슬(카테네인)을 보여주는 분할 화면

에너지를 주면 모터가 된다

그냥 지들 멋대로 도는 고리는 장난감이지 기계가 아니다. 진정한 기계는 인간이 원할 때 스위치를 켜서 움직이게 해야 한다. 소바주 연구팀은 이 사슬 고리에 찰나의 '전기 충격'을 가하거나 특정한 '빛'을 쪼이는 스위치를 달았다. 전기를 찌릿 주면 사슬의 한쪽 고리가 180도 휙! 하고 돌아가고, 전기를 끄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플라스크 속의 액체 화학 물질이 인간의 통제를 받으며 피스톤처럼 슉슉 살아 움직이는 완벽한 '나노 모터(Nano-motor)'로 각성한 것이다.

생명의 기계를 모방하다

소바주가 발명한 분자 톱니바퀴는 이후 쏟아져 나온 분자 자동차, 분자 근육, 분자 컴퓨터 등 모든 '분자 기계(Molecular Machine)' 공학의 위대한 뼈대가 되었다. 우리 몸속에서 근육을 수축시키거나 ATP를 찍어내는 단백질 모터들 역시 뼈와 살이 아니라, 카테네인처럼 기계적으로 얽혀서 펌프질을 하는 정교한 초분자 기계들이다. 소바주는 생명이 독점하고 있던 움직임의 비밀을 가장 순수한 화학 기호로 훔쳐낸 프로메테우스였다. 빛나는 칠판 앞에 서서 마술사의 맞물리는 고리처럼 보이는 두 개의 얽힌 분자의 빛나는 홀로그램 모델을 자랑스럽게 들고 있는 장 피에르 소바주의 초상화

남은 과제

이 분자 기계들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 수많은 물 분자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혼돈의 플라스크(브라운 운동)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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