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더하기 생명과학의 극적인 발전 극지로부터
영하 50도의 남극 얼음바다 속에서도 피가 얼지 않고 살아남는 물고기와 미생물들, 그들의 몸속에 숨겨진 '결빙 방지 단백질'의 생물학적 기적을 파헤친다.
편집부 · 2022년 9월 12일 · 읽는 데 4분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땅, 남극. 겨울철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곤두박질치고 바닷물마저 꽁꽁 얼어붙는 이 하얀 지옥은 생명체에게는 죽음의 땅이다. 일반적인 물고기라면 얼음물에 들어가는 순간 핏속의 수분이 날카로운 얼음 결정으로 변해버리고, 그 얼음 칼날들이 세포벽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단 몇 분 만에 끔찍하게 즉사할 것이다. 하지만 남극의 얼음바다 밑바닥을 탐사하던 해양학자들은 그곳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빙어(남극암치)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생물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피가 얼어붙지 않는 걸까? 영하의 바다에서 펄떡이는 극한 생명체들의 유전자 속에 새겨진 가장 차가운 화학적 기적을 들여다보자.
혈관 속의 부동액, 결빙 방지 단백질
남극암치의 피가 얼지 않는 비밀은 이들의 간에서 만들어내는 특수한 화학 물질인 '결빙 방지 단백질(AFP, Antifreeze Protein)'에 있다. 우리가 겨울철 자동차 엔진이 터지지 않도록 라디에이터에 초록색 부동액을 넣는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이치다. 물고기가 얼음물에 들어가서 혈관 속에 아주 미세한 1밀리미터짜리 얼음 알갱이가 생겨나면, 이 단백질 덩어리들이 마치 벌떼처럼 얼음 결정의 표면으로 맹렬하게 달려들어 찰싹 달라붙는다. 단백질들이 얼음의 겉면을 코팅해버리니, 얼음 결정이 더 이상 덩치를 키우지 못하고 아주 미세한 가루 상태로 혈관 속을 둥둥 떠다니게 된다. 세포를 찢어버릴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생겨나는 것을 원천 차단해 버린 것이다.
저온성 효소, 차가울수록 맹렬하게 일한다
얼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명체가 살아 숨 쉬려면 밥을 소화시키고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효소)이 돌아가야 한다. 일반적인 효소는 사람의 체온인 37도 주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하고, 온도가 떨어지면 꽁꽁 얼어붙어 파업을 해버린다. 하지만 극지방의 빙하나 심해에 사는 '극한 미생물'들은 구조가 헐렁헐렁하고 유연한 '저온성 효소'를 가지고 있다. 이 효소들은 영상 0도 근처의 끔찍한 추위 속에서도 관절이 굳지 않고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단백질을 분해하고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 차가울수록 미쳐 날뛰는 이 기괴한 생물학적 모터 덕분에 극지방의 생태계가 굴러가는 것이다.
인류의 생명을 연장할 극지방의 보물
과학자들은 이 극지방 생명체들의 기이한 능력을 훔쳐내어 인류의 의학을 통째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장기 이식'이다. 기증자의 심장이나 간을 다른 환자에게 이식하려면 얼음에 담가서 운반해야 하는데, 이때 세포가 얼어 터지면서 장기가 금방 상해버린다. 하지만 남극 물고기의 '결빙 방지 단백질(AFP)'을 장기 보존액에 섞어주면, 장기를 꽁꽁 얼려도 얼음 칼날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심장을 몇 달 동안이나 싱싱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된다. 냉동 인간의 꿈이 남극 바다 밑바닥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찬물에서도 때가 쏙 빠지는 세제
저온성 효소는 이미 우리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찬물에 빨래를 돌려도 기름때가 기가 막히게 분해되는 '찬물 전용 세탁 세제'가 바로 극지방 미생물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만든 단백질 분해 효소를 듬뿍 넣은 제품이다. 물을 펄펄 끓일 필요가 없으니 전 세계의 세탁기 전기 요금을 획기적으로 낮춰주는 놀라운 친환경 나노 기술인 셈이다.
남은 과제
지구 온난화로 남극의 얼음이 미친 듯이 녹아내리면서, 이 귀중한 유전자원(극지 생물)들이 인류가 제대로 연구하기도 전에 바닷물 온도 상승으로 인해 영원히 멸종할 위기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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