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의 면역 기억에서 시작된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의 기원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는 처음부터 도구로 발명된 것이 아니다. 세균이 바이러스의 침입을 기억하고 물리치던 면역 체계를 과학자들이 빌려 온 것이다.
Antigravity AI · 2023년 11월 9일 · 읽는 데 4분
오늘날 유전자 가위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퍼는 원래 세균이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쓰던 면역 체계다. 세균은 한 번 침입했던 바이러스의 유전자 조각을 자기 유전체에 기록해 두었다가, 같은 바이러스가 다시 들어오면 그 기록을 이용해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찾아 잘라 낸다. 과학자들은 이 원리를 이해한 뒤, 기록 부분을 원하는 서열로 바꾸어 어떤 생물의 유전자든 정확히 자르는 도구로 만들었다.
이상한 반복 서열은 어떻게 처음 발견되었나
1980년대 후반, 일본의 연구자들은 대장균의 유전자를 분석하다 이상한 구간을 발견했다. 짧은 서열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번 되풀이되는 구간이었다. 반복 서열 사이사이에는 매번 다른 짧은 서열이 끼어 있었다. 당시에는 이것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후 여러 세균과 고세균에서 비슷한 구조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이 구간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모여 있는 짧은 회문 반복 서열'이라는 뜻의 영어 머리글자를 딴 크리스퍼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름은 붙었지만 정체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사이에 끼인 조각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2000년대 중반, 연구자들은 반복 서열 사이에 끼인 조각들을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조각들 상당수가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의 유전자와 일치했다. 세균이 과거에 마주쳤던 바이러스의 일부를 자기 유전체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발견은 하나의 가설로 이어졌다. 크리스퍼는 세균의 면역 기억이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곧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요구르트를 만드는 데 쓰는 세균을 바이러스에 노출시키자, 살아남은 세균의 크리스퍼에 그 바이러스의 조각이 새로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 세균들은 같은 바이러스에 저항성을 보였다. 사람의 면역계가 병원체를 기억하듯, 세균도 나름의 방식으로 침입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세균은 기억을 어떻게 무기로 쓰나
세균의 크리스퍼 체계는 세 단계로 움직인다.
| 단계 | 하는 일 |
|---|---|
| 기록 | 침입한 바이러스 유전자의 일부를 잘라 크리스퍼 구간에 끼워 넣는다 |
| 준비 | 저장된 조각을 RNA로 옮겨 적어 '수배 전단'을 만든다 |
| 공격 | RNA가 단백질 가위와 짝을 이뤄 같은 서열을 찾아 자른다 |
이때 가위 역할을 하는 단백질 가운데 하나가 Cas9이다. Cas9은 RNA를 길잡이로 삼아 그와 맞는 DNA 서열을 찾아가 두 가닥을 모두 자른다.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잘리면 바이러스는 더 이상 번식하지 못한다.
면역 체계는 어떻게 도구가 되었나
2012년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와 제니퍼 다우드나는 Cas9과 길잡이 RNA만 있으면 시험관 안에서 원하는 DNA를 자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핵심은 길잡이 RNA의 서열을 바꾸면 가위가 찾아가는 목표도 바뀐다는 점이었다. 세균이 바이러스를 찾는 데 쓰던 수배 전단을, 과학자가 원하는 유전자의 얼굴로 바꿔 끼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곧이어 사람과 동물 세포에서도 이 방법이 작동한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두 사람은 2020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전에도 유전자를 자르는 도구는 있었지만, 목표를 바꿀 때마다 새로운 단백질을 설계해야 해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다. 크리스퍼는 짧은 RNA 하나만 새로 만들면 되기 때문에 훨씬 쉽고 값싸게 쓸 수 있었다. 이 차이가 크리스퍼를 전 세계 실험실로 빠르게 퍼뜨렸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
세균의 크리스퍼 체계에는 Cas9 말고도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는 기능이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세균이 어떤 바이러스 조각을 기록하고 어떤 것은 무시하는지, 기록이 쌓이면서 오래된 기억은 어떻게 정리되는지도 연구가 진행 중이다. 자연이 수십억 년 동안 다듬은 면역 체계 안에 새로운 도구가 더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크리스퍼의 기원 연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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