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우리나라 제 1호 화학박사 이태규

일제 강점기의 차별을 뚫고 한국인 최초의 화학 박사가 되어 전 세계 물리학계를 뒤흔든 '리-아이링 이론'을 완성한 천재 과학자 이태규의 삶을 조명한다.

편집부 · 2023년 4월 28일 · 읽는 데 4분

역사적 과학, 빛나는 화학 플라스크를 들고 복잡한 유체 역학 방정식으로 가득 찬 칠판 앞에 서 있는 1950년대 품위 있는 한국 과학자의 초상화
역사적 과학, 빛나는 화학 플라스크를 들고 복잡한 유체 역학 방정식으로 가득 찬 칠판 앞에 서 있는 1950년대 품위 있는 한국 과학자의 초상화

과학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도 없는 한국 과학계의 현실을 한탄할 때, 우리는 종종 아깝게 노벨상을 놓친 천재 과학자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이름은 대한민국 제1호 화학 박사이자, 일제 강점기의 멸시를 뚫고 전 세계 화학 교과서에 자신의 성(Ree)을 아로새긴 '이태규(1902~1992)' 박사다. 일본인들의 차별 속에서 교토 제국대학 최초의 조선인 교수가 되었고, 세계 최고의 석학들이 모인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아인슈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유체 역학의 가장 어려운 난제를 풀어낸 사나이. 케첩을 짤 때 왜 처음엔 안 나오다가 푹 하고 터져 나오는지, 그 기괴한 액체의 흐름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낸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의 주인공, 이태규 박사의 위대한 화학적 족적을 따라가 보자.

조선인 천재, 일본의 콧대를 꺾다

190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이태규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그는 식민지의 억압 속에서도 일본 교토 제국대학 화학과에 진학하여 수석을 차지했다. 당시 일본인 교수들은 조선인 제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이태규의 압도적인 천재성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환원 니켈을 촉매로 한 일산화탄소 분해'라는 뛰어난 논문으로 1931년 한국인 최초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아냈다. 이 소식은 동아일보 1면에 대서특필되며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조선인들에게 거대한 희망의 불꽃이 되었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조선인 최초로 제국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일본의 차별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적인 무대에서 화학의 끝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프린스턴의 만남, 헨리 아이링과의 조우

1938년, 이태규는 마침내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프린스턴은 아인슈타인이 복도를 걸어 다니고 폰 노이만이 양자역학을 연구하던 전 세계 천재들의 집결지였다. 이곳에서 이태규는 화학 반응 속도론의 세계적인 거장인 '헨리 아이링(Henry Eyring)' 교수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아이링 교수는 물체(분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하는지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두 천재는 의기투합하여 과학계의 가장 골치 아픈 난제 중 하나였던 '비뉴턴 유체(Non-Newtonian Fluid)'의 흐름을 분석하는 연구에 미친 듯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빛나는 네온 녹색으로 밝혀진 고체와 흐르는 액체(비뉴턴 유체)처럼 중력을 거스르는 액체의 초현실적인 시각화

물리학의 난제를 풀다, 리-아이링 이론

물이나 공기 같은 평범한 액체(뉴턴 유체)는 힘을 주는 만큼 정직하게 모양이 변하고 흐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늪(진흙), 피, 케첩, 마요네즈처럼 가만히 두면 고체처럼 굳어 있다가 힘을 꽉 주면 갑자기 액체처럼 푹 퍼져 흐르는 기괴한 물질들이 있다. 이것을 '비뉴턴 유체'라고 한다.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이 기괴한 액체의 점도와 흐름을 수학 공식으로 계산하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태규와 아이링은 이 복잡한 액체의 흐름을 분자 단위의 충돌과 에너지 장벽을 이용해 완벽한 수학 방정식으로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1955년에 발표된 이 위대한 공식이 바로 전 세계 화학과 물리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이다. 이 공식 덕분에 인류는 플라스틱을 녹여서 모양을 찍어내거나 끈적한 석유를 파이프라인으로 뿜어내는 현대 산업 공정을 완벽하게 계산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과학의 주춧돌을 놓다

이태규 박사는 미국 유타 대학교에서 아이링과 함께 수백 편의 논문을 쏟아내며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세계적인 석학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조국을 잊지 않았다. 1973년,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허허벌판이었던 대한민국 과학계에 선진국의 연구 시스템을 심고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을 실험실에서 플라스크를 닦다가 1992년 9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과학 선구자의 여정을 보여주는 식민지 한국에서 교토, 프린스턴 대학교로 이어지는 경로를 추적하는 빛나는 선이 있는 빈티지 세계 지도](https://image.polli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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