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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온라인 과학매거진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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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마리 퀴리, 새로운 세계를 열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과학자


1955년 4월 20일, 퀴리 부부의 유해가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프랑스에 있는 팡테옹의 입구에는 “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사의를 표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교회였으나 1791년 ‘미라보 Mirabeau’라는 혁명가가 묻히고 1885년 정치가 ‘빅토르 위고 Victor Hugo’의 유해가 안장되면서 묘지로 사용되어왔다. 이렇듯 팡테옹은 프랑스의 위인만이 묻힐 수 있는 묘지이다. 마리 퀴리는 남편이 아닌 본인만의 업적으로 팡테옹에 묻힌 최초의 여성이었다.





1867년,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다섯 자녀의 막내로 마리가 태어났다. 마리는 어려서부터 청년기까지 고향에서는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Marja Sklo-dowska)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때, 폴란드는 러시아 지배 아래 모국어를 쓰지도 못 했을 뿐더러, 역사도 공부할 수 없었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교사로, 후에 명문 여자 사립 학교장이 된다. 마리아의 자매들은 어머니를 ‘가정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매우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 하였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러시아 치하의 공립 중등학교 물리학 수학 교사였다. 마리아의 부모님은 자녀들을 성차별 없이 모두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다.


1876년, 마리아의 큰 언니가 발진티푸스로 죽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878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가족의 곁을 떠난다. 이때 마리아는 큰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마리아는 고교 과정을 반에서 1등으로 졸업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마리아가 다른 환경에서도 살게 할 수 있도록 1년간 시골에 있는 외삼촌 댁에 보낸다.


바르샤바의 대학은 여성의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마리아는 프랑스로 유학을 하러 가서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돈이 마땅치 않았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언니 브로니아와 계약을 하게 된다. 언니가 먼저 파리에서 의학 학위를 따는 동안, 마리아가 집에 남아있으면서 돈을 벌어주고, 언니가 의학 학위를 따고 돈을 벌 수 있게 되면 그때 마리아가 파리로 유학을 가기로 한다. 4년 동안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1891년 말에 마리아는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고, 물리학과 수학 학위를 취득한다. 1895년에는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고, 두 딸을 둔다. 피에르의 동료 앙리 베크렐이 우연히 방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베크렐은 우라늄염을 햇볕에 쬐지 않아도 그 자체에서 물질을 투과하는 방사선이 나옴을 발견한다. 이는 놀라운 발견이지만, 동시에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견하면서 베크렐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마리 퀴리 부부는 베크렐의 발견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베크렐선에 대해 연구하기로 한다.


하지만 마리는 방사능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방사성 원소에 의해 방출되는 선은 너무 강력해서 살아 있는 세포를 망가뜨리고 내장에 손상을 입힌다. 부부와 동료들은 이러한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결국 피에르는 신경 쇠약을 진단받고 마리는 빈혈과 저체중을 겪게 되었다.


마리 퀴리는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고,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노벨상 최다 기록을 세웠다. 1896년 마리는 남편의 동료였던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 염에서 일어나는 베크렐선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계에 베크렐선 현상을 보이는 물질이 우라늄 외에도 더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그 물질들을 찾아 연구하기로 한다. 마리는 우라늄 화합물 중에도 역청 우라늄이 순수한 우라늄보다 방전을 더 많이 시킨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사실은 우라늄보다 방전을 더 잘 시키는 알려지지 않은 원소가 역청 우라늄에 섞여 있음을 뜻했다. 이에 마리는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는 것으로 목표를 세웠다.


이후 퀴리 부부는 공동으로 연구를 시작하고, 무수히 많은 지루한 실험들 끝내 피치블레드에서 새로운 성분을 분리하였다. 그리고 이 미지의 물질이 두 가지 원소의 혼합물임을 밝히고, 그중 하나를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새로운 원소는 우라늄 염보다 400배나 감광작용이 강했다. 이들은 이 새로운 원소를 마리의 조국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 명명하였다. 마리는 자연계에서 감광작용과 전리 작용 및 형광작용을 나타내는 물질들을 처음으로 방사성물질, 방사능이라 불렀고, 방사능에서 나오는 빛을 방사선이라 하였다.


그리고 약 6개월 뒤, 또 다른 방사성 원소의 발견을 주장하였다. 이 원소는 감광작용이 우라늄보다 무려 250만배나 강했고, 강력한 빛을 반사한다는 뜻으로 ‘라듐’이라 명명하였다.


퀴리 부부가 라듐의 성질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 이 방사능은 어떠한 화학작용에도 쉽게 변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또, 방사선의 세기와 라듐의 양은 비례하고, 감광작용과 전리 작용도 비례함을 확인하였다. 또, 방사선 방출과정에서 열이 발생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 당시의 화학반응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마리는 이러한 사실들이 분자 수준이 아닌, 원자 단위 수준에서 연구해야 함을 밝혀내 과학 연구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


1911년에 마리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가입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보수성, 그녀가 불륜 행위를 하였다는 언론의 공세,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급진적인 자유주의 여성이고 페미니스트라는 성차별적인 문제로 한 표 차로 가입하지 못하였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1979년이 되어서야 여성 회원을 뽑았다.


마리 퀴리는 남편이 죽고 나서도 연구소를 맡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915년 그녀는 라듐 연구소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연구원들과 함께 계속 연구를 진행한다. 마리는 연구원을 직접 뽑았는데, 여성과 폴란드인을 선호했다. 1920~1930년대 내내 연구소는 번창했지만 마리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결국 그녀는 “극단적인 형태의 치명적인 빈혈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1934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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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더 많이 이해해야 하는 때다. 그렇게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 19세기에 태어나 여자로서 과학을 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을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에 만약 마리 퀴리가 19세기가 아닌 21세기 오늘날의 마리아였다면 남편의 조수가 아닌 뛰어난 과학자로 생전에 더 많은 영광과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19세기 말,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인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고, 역사도 배울 수 없었다. 하지만 높은 학구열을 가지고 계셨던 마리의 부모님 덕분에 마리의 남매들은 폴란드어를 배울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만약 부모님이 마리가 딸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가르치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까지도 방사선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까지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리 퀴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의 후보에서 제외될 뻔하기도 했으며, 페미니스트 수학자 괴스트 미타그레플러로 인해 후보로 올라올 수 있게 되었지만, 심사위원단은 그녀를 남자의 곁에서 보조를 맞춰주는 사람이라 하였다. 1920년에는 당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경의의 인사를 받고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지만, 하버드 대학 총장은 ‘마리 퀴리는 단지 라듐에 관한 연구의 사소한 부분에서만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며 그녀에게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렇듯 여성의 지위가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 퀴리는 세상을 탓하지 않으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마리 퀴리,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최초로 노벨상을 다른 분야에서 두 번이나 받은 과학자, 여성 최초의 소르본 대학 교수인 그녀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수많은 곳에 붙여진다. ‘최초’라는 수식어는 이전에 있지 않았던 일을 맨 처음 했을 때에 붙는 수식어이다. 마리 퀴리는 과학 세계에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 과학자이며, 피에르와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실험을 통해 결국에는 결과를 얻어내는 ‘끈기’를 보여주었다. 또,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를 이어나가 우리는 과학의 세계를 더 넓히고, 수많은 궁금증들을 해결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원하던 케미 2019 봄호


작성자: 18-044 박유진

분야: 방사능(Radioactivity)


참고문헌:

[1] The Nobel Prize (노벨위원회)

https://www.nobelprize.org/prizes/chemistry/2018/press-releas

[2] 두산백과 - 마리 퀴리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50925&cid=40942&categoryId=34348

[3] 위키백과 - 팡테옹

https://ko.m.wikipedia.org/wiki/팡테옹


이미지:

[1] https://www.google.com/url?sa=i&source=images&cd=&ved=2ahUKEwiHxqvXvafhAhVN05QKHWfUAzEQjRx6BAgBEAU&url=http%3A%2F%2Fm.blog.naver.com%2Fpark599%2F220814508260&psig=AOvVaw3VyW4KIr2bDSjFj2srn211&ust=1553953397516596


동영상:

[1] https://m.youtube.com/watch?v=w6JFRi0Qm_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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