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세균도 바이러스도 아닌 병원체의 정체

DNA나 RNA 같은 유전 물질조차 없이 오직 잘못 접힌 단백질만으로 생명체를 감염시키고 파괴하는 미스터리한 병원체, 프리온의 기괴한 특성을 파헤친다.

편집부 · 2024년 3월 27일 · 읽는 데 4분

생물학적 공포, 갑자기 꼬이고 뒤틀려 치명적인 돌연변이 프리온 모양으로 변하는 정상 단백질의 빛나는 3D 렌더링
생물학적 공포, 갑자기 꼬이고 뒤틀려 치명적인 돌연변이 프리온 모양으로 변하는 정상 단백질의 빛나는 3D 렌더링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싸워온 전염병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스스로 분열하여 번식하는 커다란 생명체인 '세균(박테리아)'과, 다른 생명체의 세포 속에 몰래 침투해 자신의 유전자(DNA, RNA)를 복제하는 좀비 같은 껍데기 '바이러스'다. 생물학자들은 어떤 질병이든 전염이 되려면 반드시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설계도, 즉 '유전 물질(핵산)'이 있어야만 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것은 생물학의 절대적인 진리(중심 원리)였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소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듯이 날뛰다 뇌가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려 죽어가는 '광우병(BSE)'이 유럽을 덮쳤을 때, 과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소의 뇌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흔적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범인의 정체는 과학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생명체도, 바이러스도 아니었다. 심지어 유전 물질조차 단 한 줌도 가지고 있지 않은, 뇌 속에 둥둥 떠다니던 그냥 평범한 '단백질 분자' 쪼가리 하나였다. 단백질이 어떻게 생명체처럼 감염을 일으키고 뇌를 파괴할 수 있는지, 과학계의 상식을 박살 낸 악마의 단백질 '프리온(Prion)'의 기괴한 세계로 들어가 보자.

유전자가 없는 감염체, 프리온의 발견

1982년, 미국의 신경학자 스탠리 프루시너(Stanley Prusiner)는 양들의 뇌에 구멍이 뚫리는 '스크래피' 병의 원인을 끈질기게 추적하다가 충격적인 가설을 발표했다. 병원체의 정체가 유전 물질이 전혀 없는 순수한 단백질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괴물에게 단백질(Protein)과 감염성(Infection)이라는 단어를 합쳐 '프리온(Pr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학계는 "설계도(DNA)가 없는 벽돌(단백질)이 어떻게 스스로 복제하여 병을 옮기느냐"며 그를 이단아 취급하고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프루시너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감염된 동물의 뇌에서 병원체를 추출해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죽이는 강력한 자외선과 방사선을 쏘고, 심지어 끓는 물에 팔팔 끓였는데도 병원체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남아 병을 옮긴다는 것을 증명했다. 오직 단백질을 분해하는 강력한 화학 약품에 담갔을 때만 전염성이 사라졌다. 15년의 외로운 싸움 끝에 그의 주장이 100% 사실로 밝혀지며, 프루시너는 1997년 단독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거머쥐게 된다.

좀비 단백질의 끔찍한 연쇄 반응

그렇다면 DNA도 없는 이 단순한 단백질 조각이 도대체 어떻게 증식(감염)하는 것일까? 그 원리는 뱀파이어나 좀비 영화와 소름 돋도록 똑같다. 원래 우리의 뇌 신경세포 표면에는 정상적인 착한 프리온 단백질(PrPc)들이 많이 붙어 있다. 이들은 모양이 부드러운 나선형(알파 나선)을 띠고 있으며, 뇌 기능을 돕는 유익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이 단백질의 모양이 종이접기가 찌그러지듯 납작하고 뻣뻣한 병풍 모양(베타 병풍)으로 휙 꺾여버리면, 절대 죽지 않는 악당 프리온(PrPsc)으로 변신한다. 이 악당 프리온 하나가 뇌 속을 떠돌다가 정상적인 착한 프리온을 만나서 톡 건드리면(접촉), 착한 프리온도 순식간에 모양이 구부러지며 악당 좀비로 변해버린다! 1마리가 2마리가 되고, 2마리가 4마리가 되는 무시무시한 도미노 연쇄 반응이 뇌 전체로 퍼져나간다.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부러진 흉측한 물리적 형태'를 곁에 있는 단백질에게 전염시키는 전대미문의 기괴한 증식 방식인 것이다. 좀비처럼 잘못 접힌 단백질이 연쇄 반응처럼 뇌 조직 표면 전체로 퍼지는 으스스한 미세한 모습

뇌를 스펀지로 만드는 악마의 응집

좀비로 변해버린 악당 프리온들은 치명적인 특징을 가진다. 서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거대한 덩어리(아밀로이드 플라크)를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 뇌의 청소부 세포들이 이 찌꺼기를 치우려고 효소를 뿌려대지만, 좀비 프리온은 끓는 물이나 소독약에도 녹지 않는 무적의 형태라 도무지 청소할 수가 없다. 결국 뇌 신경세포 안에 찌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세포가 펑펑 터져 죽게 되고, 죽은 세포 자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 뇌가 수세미나 스펀지처럼 변해버린다. 소에게 나타나면 미친 듯이 주저앉는 광우병(BSE)이 되고, 사람에게 나타나면 급격한 치매와 전신 마비로 1년 안에 사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이 된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가장 흔한 벽돌(단백질)이 미세하게 모양 하나 꺾였다는 이유만으로 뇌를 갉아먹는 최악의 살인마로 돌변한 것이다.

동족상잔의 저주, 쿠루병과 육골분

자연 상태에서 돌연변이 프리온이 생길 확률은 100만 분의 1로 매우 희귀하다. 그런데 왜 1990년대 영국에서 수십만 마리의 소가 떼죽음을 당하는 재앙이 터졌을까? 바로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농장주들은 소를 빨리 살찌우고 젖을 많이 짜내기 위해, 죽은 양이나 소의 고기와 뼈를 갈아서 만든 사료(육골분)를 초식 동물인 소에게 억지로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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