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체의 비밀 색각이상과 4색각
망막의 원추세포 결핍으로 발생하는 색각 이상(색맹)의 유전적 메커니즘과, 보통 사람보다 100배 더 많은 색을 보는 4색각자(테트라크로맷)의 신비를 탐구한다.
편집부 · 2021년 11월 5일 · 읽는 데 4분
하늘은 파랗고 사과는 빨갛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의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만약 당신 옆에 서 있는 친구의 눈에는 저 빨간 사과가 칙칙한 초록색으로 보인다면 어떨까? 반대로 어떤 사람의 눈에는 당신이 '그냥 빨간색'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사과의 색깔 속에서 수십 가지의 미세하게 다른 자주색과 주홍색이 소용돌이치는 황홀한 팔레트가 보인다면? 색깔은 사물 자체에 칠해져 있는 잉크가 아니다. 색(Color)은 빛의 파장이 우리 눈의 망막에 부딪힐 때 뇌가 억지로 지어내는 '가상의 감각'일 뿐이다. 눈알 속에 빛의 파장을 감지하는 센서(원추 세포)가 몇 개냐에 따라 세상은 흑백 텔레비전이 되기도 하고, 1억 개의 색상을 뿜어내는 8K 울트라 HD 화면이 되기도 한다. 붉은색과 초록색을 구별하지 못해 평생을 신호등의 위치로만 길을 건너야 하는 '색각 이상(Color blindness)'의 슬픈 유전학과, 인류의 1%만이 가진 축복이자 저주인 '4색각(Tetrachromacy)'의 신비로운 생물학적 비밀을 들여다보자.
망막의 픽셀 센서, 3가지 원추 세포
보통의 인간은 뇌 속에 세 가지 물감을 섞어 세상을 칠한다. 우리 눈의 망막 뒤쪽에는 빛을 감지하는 시세포가 촘촘히 박혀 있는데, 그중 색깔을 구별하는 센서를 '원추 세포(Cone cell)'라고 부른다. 인간은 빨간색(긴 파장), 초록색(중간 파장), 파란색(짧은 파장)의 빛에 각각 반응하는 3가지 종류의 원추 세포(3색각)를 가지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이 RGB(Red, Green, Blue) 세 가지 빛을 조합해 모든 색을 만들어내는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원리다. 빛이 눈으로 들어오면 이 세 가지 센서가 저마다의 세기로 흥분하여 뇌에 전기 신호를 보내고, 뇌는 이 신호들의 비율을 계산해 약 100만 가지의 색상을 구별해 낸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인간의 조상인 영장류가 숲속에서 잘 익은 '빨간색 과일'과 어린 '초록색 잎'을 기가 막히게 구별하여 따 먹고 살아남기 위해 이 3색각 시스템을 발달시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반면 냄새로 사냥을 하는 개나 고양이는 굳이 색을 구별할 필요가 없어 원추 세포가 2개(2색각)뿐이라 세상을 흐릿한 파란색과 노란색 위주로 본다.
빨강과 초록의 미로, 색각 이상의 유전학
그런데 전체 남성의 약 8%(여성은 0.5%)는 이 세 가지 물감 중 하나가 모자란 채로 태어난다. 가장 흔한 것이 붉은색 센서(적색맹)나 초록색 센서(녹색맹)가 아예 없거나 기능이 고장 난 '적녹 색각 이상'이다. 이들의 눈에는 빨간색 단풍잎과 초록색 소나무 잎이 모두 칙칙한 갈색이나 노란색으로 똑같이 뭉뚱그려져 보인다. 고기를 구울 때 핏기가 가시고 익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 가혹한 결함이 유독 '남성'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유전학의 장난 때문이다. 적색과 녹색 원추 세포를 만드는 유전자 설계도는 오직 'X 염색체'에만 들어 있다. 여성(XX)은 X 염색체가 두 개라서 하나가 고장 나도 나머지 하나가 정상적으로 센서를 만들어내지만, 남성(XY)은 X 염색체가 단 하나뿐이라 이것이 고장 나면 여지없이 색맹이 되어버리고 만다. 모계 유전의 가장 얄궂고 대표적인 사례다.
세상을 1억 가지 색으로 보는 초능력, 4색각
결핍이 있다면 반대로 잉여의 기적도 존재한다. 색맹의 유전 법칙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기발한 가설을 세웠다. 만약 한쪽 X 염색체에는 '정상적인 빨간색 센서'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다른 쪽 X 염색체에는 미세하게 돌연변이가 일어나 '주황색 센서'로 변해버린 유전자를 동시에 가진 여성(XX)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여성의 망막에는 빨강, 주황, 초록, 파랑이라는 무려 '4개의 원추 세포(Tetrachromat)'가 촘촘히 박히게 된다! 일반인이 100만 가지 색을 본다면, 4개의 센서를 가진 '4색각자'는 이론적으로 무려 1억 가지의 색상을 미세하게 쪼개서 볼 수 있다. 2010년 신경학자 가브리엘 조던 연구팀은 20년의 추적 끝에 마침내 이 기적의 눈을 가진 여성을 찾아냈다. 그녀의 직업은 화가(콘체타 안티코)였는데, 그녀가 그린 숲속의 그림에는 일반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잎사귀 그림자 속의 수만 가지 보라색과 에메랄드빛이 황홀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대리석의 흰색 속에서 수십 가지의 분홍빛과 노란빛을 읽어내는 그녀에게, 평범한 인간의 3색각 세상은 답답한 흑백 영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진화의 축복인가, 현대의 저주인가
4색각자들은 밤하늘을 볼 때도 일반인과는 완전히 다른 스펙트럼의 별빛을 만끽한다. 하지만 이 초인적인 시각이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괴로운 '저주'가 되기도 한다. 대형 마트에 가면 진열된 과일이나 인공조명이 뿜어내는 너무나 복잡하고 현란한 색채 정보들이 뇌로 마구 쏟아져 들어와 심각한 두통과 멀미를 느끼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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