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생명

새로운 요리의 세계 분자요리

식재료를 화학적, 물리적 단위로 분해하고 재조립하여 상식을 파괴하는 분자 미식학의 과학적 원리와 아방가르드 요리의 세계를 소개한다.

편집부 · 2021년 10월 10일 · 읽는 데 4분

분자 미식학, 완벽하게 빛나는 캐비어 펄을 만들기 위해 피펫을 사용하여 화학 욕조에 녹색 액체를 떨어뜨리는 셰프
분자 미식학, 완벽하게 빛나는 캐비어 펄을 만들기 위해 피펫을 사용하여 화학 욕조에 녹색 액체를 떨어뜨리는 셰프

최고급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에 영롱한 주황색 연어알이 듬뿍 올라간 요리가 서빙된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톡 터지는 알 속에서 생선 냄새 대신 달콤하고 시원한 멜론 주스가 입안을 적신다. 옆에 놓인 바삭한 감자칩은 입에 넣자마자 눈을 밟은 듯 푹신하게 녹아내리고, 구운 쇠고기 스테이크에서는 차가운 얼음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눈으로 보는 질감과 입으로 느끼는 맛이 철저하게 배신당하는 기괴하고도 황홀한 경험. 마법사가 부린 요술 같지만, 이 모든 것은 화학 플라스크와 원심분리기, 액체 질소가 만들어낸 치밀한 과학의 산물이다. 식재료를 세포와 분자 단위로 해체한 뒤 물리화학적 반응을 이용해 엉뚱한 형태로 재조립하는 21세기 식탁 위의 아방가르드, 바로 '분자 요리(Molecular Gastronomy)'다. 셰프의 주방을 첨단 화학 실험실로 탈바꿈시키며 전통 요리의 고정관념을 산산조각 낸 분자 미식학의 과학적 원리를 혀끝으로 맛보자.

주방으로 들어온 괴짜 과학자들

수백 년 동안 요리는 셰프들의 '감'과 '비법'으로 전수되어 온 예술의 영역이었다. "고기를 구울 때는 육즙을 가두기 위해 센 불로 겉을 바싹 익혀야 한다"는 식의 격언이 진리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프랑스의 화학자 에르베 티스(Hervé This)와 헝가리의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Nicholas Kurti)는 주방의 낡은 격언들에 현미경과 온도계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기의 단백질(미오신과 액틴)이 정확히 몇 도에서 수축하고 육즙을 뱉어내는지 화학적 방정식을 계산해 냈고, 센 불로 겉을 굽는다고 해서 육즙이 갇히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냈다. 이들은 "인류는 금성의 온도는 정확히 재면서, 왜 수플레(달걀 빵) 속이 왜 부풀어 오르는지는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가!"라며 한탄했다. 이 괴짜 과학자들의 반란은 스페인의 천재 셰프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à)의 전설적인 레스토랑 '엘 불리(El Bulli)'와 만나면서, 식재료의 분자 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쳐 새로운 질감을 창조해 내는 '분자 요리'라는 폭발적인 트렌드로 만개하게 되었다.

구체화(Spherification), 톡 터지는 과일 캐비어

분자 요리를 대중에게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킨 대표적인 기술은 '구체화(Spherification)' 기법이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생선 알(캐비어)처럼 생겼지만 씹으면 액체 소스가 터져 나오는 마술이다. 원리는 해조류에서 추출한 화학 물질인 '알긴산나트륨(Sodium Alginate)'을 이용한 겔화 반응이다. 과일 주스에 알긴산나트륨 가루를 섞은 뒤, 스포이트로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려 젖산칼슘(염화칼슘)이 섞인 물속으로 빠뜨린다. 주스 방울이 칼슘 물에 닿는 찰나의 순간, 겉면에 있던 알긴산 분자들이 칼슘 이온과 찰칵찰칵 결합하며 얇고 질긴 젤리 껍질(막)을 순식간에 형성해 버린다. 주스 방울이 통째로 굳기 전에 재빨리 뜰채로 건져내면, 얇은 껍질 속에 과즙이 찰랑거리는 완벽한 구슬(캐비어)이 완성된다. 셰프들은 이 기술을 이용해 발사믹 식초로 구슬을 만들어 샐러드에 뿌리거나, 올리브오일 주머니를 만들어 입안에서 폭죽처럼 풍미가 터지는 기막힌 식감을 연출해 냈다. 블로운 슈가 유리와 연기가 나는 액체 질소로만 만들어진 완벽한 사과 복제품과 흡사한 초현실적인 디저트

에스푸마와 거품의 미학

무거운 크림이나 밀가루를 쓰지 않고 재료의 순수한 맛만 구름처럼 솜사탕처럼 가볍게 떠먹게 만드는 '에스푸마(Espuma, 거품)' 기법 역시 분자 요리의 상징이다. 아황산가스(N2O) 가스가 들어간 사이펀(휘핑기) 통 안에 감자 퓌레나 생과일주스를 넣고 가스를 쏘아버린다. 가스가 액체 속에 미세한 거품(기포)을 억지로 밀어 넣어 갇히게 만들고, 여기에 콩에서 추출한 유화제인 레시틴(Lecithin)을 살짝 섞어주면 물과 공기가 분리되지 않고 쫀쫀하게 결합하여 거품이 무너지지 않는다. 접시 위에 짜낸 에스푸마는 혀에 닿는 순간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지지만, 재료 본연의 향과 맛은 입안 전체에 폭발적으로 남게 된다. 물리적으로 질량을 덜어내고 향기의 본질만 남기는 극한의 미니멀리즘이다.

수비드와 액체 질소, 온도의 파괴

분자 미식학은 불로 요리한다는 원시적인 상식도 파괴했다. '수비드(Sous-vide)'는 고기를 진공 비닐 팩에 밀봉한 뒤, 단백질이 굳어지기 시작하는 60~65도 사이의 따뜻한 물속에 담가 몇 시간이고 천천히 익히는 저온 조리법이다. 세포가 파괴되지 않아 육즙이 100% 갇혀 있고, 이빨이 없는 노인도 씹을 수 있을 만큼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궁극의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만들어낸다. 반대로 영하 196도의 '액체 질소(Liquid Nitrogen)'를 주방에 들여와, 셰프가 방독면을 쓰고 초콜릿 무스나 허브 잎을 순식간에 꽝꽝 얼려버리기도 한다.

이어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