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인 거시 세계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인 미시 세계로 나누는 방식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거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체로 우리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기 쉽다.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 위에 거품이 생기는 일들 말이다. 반대로 미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기 어려우며 눈으로도 볼 수 없어 우리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과학자들은 이 미지의 세계를 연구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 장치를 개발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미시 세계를 관찰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하면 복잡하고 어려운 원리를 이용한 도구들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거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리와 유사한 방식을 이용해 수수께끼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장치들이 존재했다. 바로, 거품상자다.
거품상자, 안개상자의 한계를 이겨내다.
거품상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핵물리학자들은 안개상자라는 실험 장치를 이용해 미지의 입자를 관찰했다. 하지만, 안개상자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존재했다. 전하를 띠지 않는 입자는 관찰할 수 없으며 장치를 이용하기 위한 준비 시간이 오래 걸렸고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측정할 수 없었다. 안개상자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당시에는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관측할 일이 없었으며 전하를 띠고 있는 입자를 측정하는 일도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안개상자가 나온 뒤 2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 장치의 문제점은 과학자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방출하는 입자 가속기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 핵물리학자들에게는 안개상자가 아닌 고속의, 고에너지의 입자를 다룰 수 있으며 전하가 없는 입자의 궤적도 추적할 수 있고 준비 시간도 길지 않은 장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거품상자의 등장
도널드 아서 글레이저, 그는 이런 핵물리학의 상황을 거품상자라는 새로운 장치로 해결한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신경생물학자다. 안개상자가 발명된 지 40년이 지난 1952년에 글레이저 교수는 거품상자를 개발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60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이 실험 장치는 저에너지를 다루는 핵물리학에서 안개상자가 기존에 수행하고 있던 역할을 고에너지를 다루는 핵물리학에서 수행할 수 있었고 준비 시간도 적게 필요했으며 전하를 띠지 않는 입자마저 일부 측정할 수 있었다.

[그림 1] 도널드 아서 글레이저
어떤 비밀이 있기에 거품상자는 안개상자가 관측하지 못하는 입자까지 관측할 수 있게 되었을까? 비밀은 바로 거품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메질에 있다. 거품상자는 액체를 매질로 사용하는데 액체를 매질로 사용하여 고에너지 입자도 효과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준비 시간도 줄어들었고 전하가 없는 입자 중 일부를 측정 가능한 영역으로 가지고 올 수 있게 되었다.
액체를 매질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이런 일을 불러올 수 있었을까? 비밀은 매질과 입자 사이의 상호 작용 빈도를 높이는 것에 있다. 매질과 입자 사이의 상호 작용 빈도가 올라가게 되면 고에너지 입자의 속도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게 되고 속도가 빠르게 줄어들게 되면 작은 크기의 상자로도 입자를 관측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상호 작용 빈도가 올라가면서 매질과 입자가 서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지고 이 덕분에 전하를 띠지 않는 입자도 관측할 수 있게 된다.

[그림 2] 거품상자의 모식도
맥주와 거품상자
글레이저 교수가 거품상자를 맥주 거품에서 모티브를 따와 만들었다고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이야기다. 도널드 글레이저 본인이 공식 석상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맥주와 거품상자는 무슨 연관 관계가 있을까? 이 부분도 매질과 관련이 있다.
초기 거품상자를 만들 때 사용할 매질에 대해 고민하던 글레이저 교수의 눈에 들어온 것이 맥주였다. 그는 맥주를 이용해서 최초의 거품상자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된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이다. 현재는 맥주를 매질로 사용하지 않고 액체 수소를 매질로 사용하고 있다.
거품상자의 원리는?
거품상자가 입자를 검출하는 원리는 탄산음료 위에 거품이 생겨나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탄산음료의 뚜껑을 열어주게 되면 병 내부의 압력에 변화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탄산이 액체를 빠져나오면서 거품이 생겨난다. 이때, 거품은 특정한 방향으로 생겨나는데 이는 거품 자신이 생겨나는데 유리한 방향으로 먼저 생성되기 때문이다. 탄산이 빠져나오기 더 유리한 환경이 형성된 방향으로 거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거품상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데 탄산이 담긴 액체의 역할을 불안정한 상태의 액체가 수행한다.
전하를 띤 입자가 거품상자에 들어가게 되면 거품상자 안에 이온을 남기며 이동한다. 이 이온들이 거품이 생성되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불안정한 상태의 액체들은 이온들이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기체로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에 사진을 촬영하면 입자가 지나간 경로를 촬영할 수 있다.
전자석, 효과적인 상자의 활용
더 효과적인 입자 추적을 위해 거품상자는 또 다른 방식을 이용하는 데 바로 상자 주변에 강력한 전자석을 두는 방법이다. 전자석은 상자 내부에 강한 자기장을 걸어주는데 전하를 가진 입자는 이 자기장의 영향을 받아 이동 방향이 휘게 된다. 이동 방향이 휘어지면 상자의 크기를 끼우지 않고도 고에너지의 입자를 측정할 수 있으며 입자가 휘는 방향과 휘는 정도 등을 이용해 미지의 입자가 가지고 있는 운동량, 속도, 질량 등을 알 수 있고 입자가 어떤 종류의 전하를 띠고 있는지까지 알 수 있다. 이 덕분에 안개상자를 이용했을 때는 쉽게 알 수 없었던 입자에 대한 정보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CERN의 가가멜, 중성미자를 발견하다.
학자들은 이 거품상자라는 새로운 장치를 이용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다른 실험 장치로는 관찰할 수 없었던 입자들까지 측정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전하를 띠지 않는 입자들도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중성미자라는 입자다. 중성미자는 약력과 중력에만 반응하는 아주 작은 질량을 가진 기본입자로 전하를 띠지 않는다. 이 입자는 볼프강 파울 리가 자신의 이론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정한 입자였는데 후에 실험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1965년 12월 유럽 입자 물리학 연구소인 CERN에서 거품상자를 이용해 중성미자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데, 그들이 진행한 프로젝트의 이름이자 거품상자의 이름이 가가멜이었다. 아마, 가가멜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면 많은 이들이 스머프에 나오는 괴물 가가멜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에게 가가멜은 괴물이 아닌 거인과 같은 존재다. 가가멜이라는 이름도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에 나오는 거인족 어머니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인의 이름을 붙일 만큼 가가멜은 당시 현존하던 어떤 거품상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거품상자였다. 그들이 이렇게 커다란 거품상자를 제작한 것은 매질과 입자 간의 상호 작용 빈도를 높이기 위해서였고 이를 위해 밀도가 높은 액체를 매질로 사용하였다. 덕분에 당시 다른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한 것보다 열 배 정도 더 많은 중성미자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림 3] 가가멜의 구조 모식도
전하가 없는 중성미자를 관찰할 것 있었던 비밀은 매질과 입자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에 들어있다. 중성미자는 물질 속에 있는 전자나 핵자와 탄성 충돌을 하는데 이때 핵자나 전자가 물질 속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이 입자들은 모두 전하를 띠기 때문에 거품상자 속 액체에 자극을 가할 수 있다. 즉, 중성미자를 관측하는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중성미자가 남기는 이온이 아닌 핵자나 전자를 이용한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게 되면 전자를 남기지 않고 움직이는 입자들도 일부 측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품상자 그 이후는?
거품상자는 안개상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여 핵물리학의 발전을 불러왔다. 거품상자 이후에는 거품상자의 문제나 한계를 뛰어넘는 와이어 상자와 스파크 상자가 등장했다. 스파크 상자는 전하를 띤 원자 구성 입자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스파크를 일으키는 장치로 과학기구 방전 상자라고도 한다. 와이어 상자는 기체 이온화의 흔적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입자나 광자의 궤도, 위치 정보를 관측하는 상자이다. 이처럼 핵물리학에서 실험 장치들은 다른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변화해왔다. 과연, 스파크 상자와 와이어 상자 이후에는 어떤 실험 장치들이 등장해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해줄까?
<참고자료>
[1] 리언 M. 레더먼, 딕 테레시, ⌜신의 입자⌟, 437쪽~443쪽, 휴머니스트, 2017년 02월 06일
[2] 이강영, ⌜보이지 않는 세계⌟, 150쪽~156쪽, 휴먼사이언스, 2012년 05월 29일
[3] 위키피다아, 거품 상자, https://en.wikipedia.org, 2019년 08월 25일
[4] 위키피디아, 도널드 글레이저, http://en.wikipedia.org, 2019년 08월 20일
[5] CERN, Gargamelle, https://home.cern, 2019년 08월 28일
<이미지>
[1] 위키피디아, 도널드 글레이저, http://en.wikipedia.org, 2019년 08월 20일
[2] wikipedia, bubble chamber, https://en.wikipedia.org, 2019년 10월 01일
[3] wikipedia, Gargamelle, https://en.wikipedia.org, 2019년 10월 01일

Physics 학생기자 송민우
201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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